혐오 폭력에서 젠더와 섹슈얼리티, 메모

혐오 폭력에서 물리적 피해는 트랜스젠더가 주로 겪고 운동의 상징성은 게이 남성이 가진다. 이것은 추론이지만 백인 게이 남성이 혐오 폭력 피해를 겪었을 때와 비백인 트랜스젠더가 혐오 폭력 피해를 겪었을 때 소위 LGBT 단체로 불리는 곳의 반응은 다르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물론 아직은 추론이다. 그리고 레즈비언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덜 논의되고, 바이의 혐오 폭력 피해는 아예 언급도 안 되는 듯하다. 나는 바로 이런 식의 위계가 혐오 폭력에서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작동하는 지점이라고 믿는다.

화학적 거세를 우려하는 이유의 배경

관련글: 화학적 거세란 말의 심란함: 여성혐오, 트랜스혐오, 이성애주의 등이 얽힌 매우 위험한 발상

어제 이 글 초안을 쓰고, 공개를 할까 말까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하는 게 좋을 거 같네요. 아무래도 제가 관련 글을 너무 짧게 써서 생긴 문제 같으니까요.

전 현재 발생하는 성폭력이 관련 처벌 조항이 없다거나(없는 것도 있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형벌이 약해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처벌을 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현재의 특별법으로도 충분히 처벌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현재의 법으로도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경찰, 검찰, 재판부의 의지가 매우 부족한 현실이죠), 사건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점이죠.

ㄱ. 화학적 거세니 형벌 기간 증가와 같은 법률상의 명문화가 보기엔 그럴 듯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형벌의 역설을 감안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형벌이 가중할 수록 사건 ‘해결’은 더 어렵고, 때로 사건 ‘해결’이 안 되고, 사건으로 구성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지는 거죠. 물론 형벌이 무겁게 바뀌면 사람들은 일말의 경각심이라도 가지겠죠. 하지만 이 경각심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요?

형벌이 화학적 거세와 최소 징역 20년이란 식으로 가중하면, 가해자는 악착같이 사건을 대법원까지 끌고 갈 겁니다. 가해자의 입장에선 대법원까지 간다고 해서 손해볼 건 없으니까요. 아울러 대법원까지 끌고 가면 “정말 가해를 안 했나 보다” 혹은 “가해자가 정말 억울한가 보다”와 같이 가해자의 편을 드는 여론이 생길 수도 있고요(실제 발생하는 경우죠). 아울러 형벌을 가중하면 판사는 현재보다 더 가해자를 봐주려고 하겠죠. 조두순 사건도 형량이 약해서라기보다는 판사가 가해자를 봐준 경우고요(이건 언제나 “정상참작”이란 탈을 쓰죠).

문제는 이렇게 사건 ‘해결’ 과정 자체가 길어질 수록 피해경험자가 겪을 고통 혹은 어려움은 더 커지고 길어진다는 거죠. 대법원까지 최소 3~4년 걸린다면, 곧 그 기간 동안 사건은 조금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거죠. 과연 이럴 때에도 형벌 가중이 효과적일까요? 글쎄요. 가해자가 악착같이 대법원까지 사건을 끌고 갈 것을 예상할 수 있을 때 피해경험자와 그 주변사람들은 쉽게 고소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형벌의 가중이 정말 피해경험자에게 이득이기만 하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겠죠. 형벌가중은 사건을 사건으로 구성할 수 없게 하는 족쇄가 되기도 하니까요. 때론 형벌가중이 피해경험자에게 더 불리한 여건으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쉽지 않습니다.

성폭력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인식 변화, 젠더 권력에 대한 인식 변화가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는 건 이런 이유에서죠. 성폭력 피해경험을 여전히 매우 부정적으로 대하는 게 현재 상황이고요. 물론 이곳에 들리고,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그렇지 않겠지요. 하지만 여전히 많은 경우 비난의 상당 부분은 피해경험자에게로 향합니다. 가해자를 비난하는 만큼이나 피해경험자 역시 비난을 경험하는 상황에서, 형벌 가중이 단편적이나마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판사, 검사, 경찰, 변호사, 주변 사람들이 언제나 “정상참작”을 주장할 수 있고, 이것이 먹혀드는 분위기에선 형벌 가중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거죠.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의 검사 박대식에게 제가 호의적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는 인종편견을 드러내는 태도를 취했지만 사건을 법적 해석에 따른 사건으로만 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의 태도가 지극히 당연하거나 ‘상식’일 텐데도 실제 그렇지 않으니까요.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태도를 대입하면, 다른 판사라면 인종편견에 따라 다른 정황은 검토하지 않고 피어슨을 취조하기 바빴겠죠.)

ㄴ. 형벌을 가중할 때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는 사건 자체를 말할 수 없게 만들 수 있다는 거죠.

형벌을 가중하면 사람들은 성폭력이 그토록 심각한 일이라고 지각은 하겠지요. 1990년대 초반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이와 동시에 피해경험자는 심각한 피해의 무력한 피해자란 이미지로만 남겠죠. 오직 고통만을 재현하고 말해야만 하는 여타의 행위자들처럼요(예를 들면, LBGT나 퀴어, 장애인처럼 지배규범은 이들의 구체적인 일상이 아니라 언제나 고통 아니면 축제만을 들으려고 하죠). 아마도 사회 전반은 오직 고통만을 듣고 싶어 하겠죠. 혹은 고통의 극복담만 들으려 하거나요. 피해경험자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듣는 게 아니라, 고통만을 들으려 하고 그 고통에 베풀 수 있는 시혜만을 듣고 싶어 할 거고요. 이 과정은 결국 피해경험자가 사건 자체를 말할 수 없는 여건을 조성하지 않을까요? 피해경험자는 사건을 말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 할 것이고, 주변사람들은 피해경험자를 낯설게 대하겠죠.

일례로, 한국에서 동성애혐오폭력, 트랜스젠더혐오폭력, 바이혐오폭력이 없어서 법적 사건이 안 되는 게 아니죠. 피해경험자들은 이것을 드러내면 더 큰 피해를 경험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피해경험자들이 법적, 제도적 사건으로 구성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몇 년 전, 한 트랜스젠더가 폭력피해경험으로 경찰서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경찰서 직원들 모두가 와서 트랜스젠더라고 피해경험자를 구경했다고 합니다. 그 경찰들이 양식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전 이런 반응이 한국사회에서의 매우 평이한 반응이라고 이해합니다. “쟤가 동성애자래.” “쟤가 트랜스젠더래.”와 같은 수근거림은 특정 사건을 드러내는 것 자체를 어렵게 하죠. 사건이 초점이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인가가 초점이 되니까요.

더 정확하게 말해, 피해경험자들이 사건을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피해경험자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되죠. 일례로,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 하기가 어려운 건, 커밍아웃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기 때문에 어려운 거죠. 누구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 일을 드러내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건이 끔찍하다고, 매우 무거운 주제라고 여겨질 수록 더 심해지죠. 그렇다고 성폭력이 가벼운 주제, 끔찍하지 않는 일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형벌을 가중하고, 성폭력 사건을 특정 이미지로 고착할 경우, 이 사건은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사건이 되고 말겠죠. 그래서 지금과 같은 집단적인 반응이 매우 우려스러워요. 이런 반응이 강할 수록 사건 자체가 은폐될 테니까요. 피해경험자가 은폐할 지, 가해자가 은폐할 지도 알 수없고요. 물론 바로 지금은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현재는 그런 분위기니까요. 하지만 이것이 지속될까요? 앞으로도 말할 수 있고, 여타의 사람들과 얘기할 수 있을까요?

저의 우려는 간단합니다. 형벌 가중으로만 논의를 진행하면, 그 논의가 의도했던 바를 달성할 수 있을까요? 그 논의의 목적인 법적 사건으로 구성하는 것 자체가 힘들 수도 있기 때문이죠. 지금 분위기가 이전의, 이후의 사건들을 법적 사건으로 구성할 수 있고, 그것이 피해경험자에게 이득으로만 작동한다면 반대할 이유도 우려를 표할 이유도 없습니다(물론 이건 좀 논쟁적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인 거죠.

…. 예. 전 이전의 관련글을 쓰기 전에 이 말을 먼저 해야 했습니다. 이런 우려 속에서 화학적 거세의 위험성을 지적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