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포비아 발언은 강의 중단 사유가 될까? – 01

여기 오는 분들은 알고 계시려나요?
관련 기사: 수업자료는 음란 동영상…강사는 음담패설 http://goo.gl/CHDIe
(모르신다면 꼭 읽어보세요.)
모 대학교 수업 시간을 다룬 기사입니다. 수업교재가 각종 혐오와 폭력으로 가득하고, 수업 내용 역시 혐오와 폭력으로 가득하죠. 그래서 몇몇 언론에서 이 수업을 다루었고, 현재 논란이 진행 중입니다.
*수업 교재에 실린 내용이 궁금하면 http://www.sexuality.or.kr/9718#1 를 참고하세요(바쁘시지 않으면 한 번 읽어보세요. 키보드워리어가 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킵니다..;; )
한 단체를 중심으로 성명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직 발표는 하지 않은 듯하고요. 그리고 성명서에 트랜스젠더 혐오 발언(트랜스여성은 “남자가 성적인 흥분과 쾌감을 경험하기 위해서 상습적으로 여자의 옷을 입는 경우를 말한다.”)과 동성애 혐오발화, 에이즈감염인 혐오발화를 비판하는 내용을 주요 문제점으로 지적하며 강의 중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조금 복잡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트랜스젠더 혐오 발화를 근거로 강의 중단을 요청할 수 있을까요?
요즘 제가 하고 있는 고민 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위의 기사에 등장한 강의의 문제가 트랜스포비아만은 아니지만 트랜스포비아가 주요 문제 중 하나일 때, 트랜스포비아를 근거로 강의 중단을 요청할 수 있을까요? 이런 고민이 든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많은 여성학 수업이 트랜스포비아 발언을, 호모포비아 발언을 일상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리수는 임신을 할 수 없어 여자가 아니다.”와 같은 발언은 여성학 수업의 강사가 했던 말입니다. 이런 발언이 트랜스포비아라고 해서, 그 강좌를 중단해야 한다고 항의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한국에선 그렇습니다. 잘해야 강사 개인에게 사과를 요청할 뿐이며, 많은 경우 그냥 넘어가죠.(저라면, 저런 말을 하는 강사라면 아예 희망도 없다고 판단하고 강의실에선 무시하겠죠. 대신 나중에 글로 쓰고요. 크크 ;; )
트랜스젠더 혐오 발화를 근거로 강의 중단을 요청할 수 있을까요?
요즘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조만간 다시 정리하고 싶지만… 어떻게 정리할까요? 쉽지 않습니다.
+이 고민은 제가 활동하고 있는 유섹인 구성원의 의견과 미묘하게 결을 달리하면서 좀 더 복잡한 상태입니다. 몸이 떠다니네요.

2011 KSCRC 겨울아카데미 “젠더포비아: 어느 트랜스젠더/’복장도착자’의 죽음”

2009년부터, 그 해 첫 번째 강의는 KSCRC 겨울아카데미 강좌다. 그래서 늘 긴장하고 떨리고 무섭고.. 흐. 그래도 늘 좋다. 해마다 하고 싶다는… 흐흐흐.
아래는 이번 강좌에서 배포판으로 작성한 글(배포판과 내가 직접 사용하는 원고는 다르다;; ). 그 외에 신문기사 세 편을 함께 읽었다. 핵심은 언제나 강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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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은 세 편의 기사는
“여친이 남자?” 격분해 트랜스젠더 살해 http://goo.gl/363Wr
아이들까지 혼란케 한 ‘여장 아빠’ http://goo.gl/STWVp
“18살 트랜스젠더의 ‘쓸쓸한 죽음'” http://goo.gl/rSMFz
2011 KSCRC 겨울아카데미 강좌3: 논쟁과 이슈. “혐오, 공포, 그리고 증오”
5강 젠더포비아: 어느 트랜스젠더/’복장도착자’의 죽음.
by 루인( runtoruin@gmail.com )
2011.02.22.화. 19:00- @이화여자대학교 ECC 132호
01
가해자가 폭력을 서술하는 과정은 자신의 젠더범주(혹은 정체성)를 입증하는 과정이다. 즉, 혐오폭력은 자신의 불안을 은폐하는 방식이다.
02
트랜스포비아: 한 개인의 젠더정체성이나 젠더표현을 이유로, 트랜스젠더, 트랜스섹슈얼 그리고 비규범적으로 젠더를 실천하는 개인을 향한 혐오, 공포, 증오.
-간접적 트랜스포비아: mtf/트랜스여성을 남성 전용 병원에 보내거나, ftm/트랜스남성에게 산부인과 서비스가 필요하단 점을 인식하지 못 하는 것과 같이, 트랜스젠더를 향한 무시나 잘못된 태도를 포함한다.
-직접적 트랜스포비아: 젠더정체성, 젠더표현 등을 이유로, 차별, 모욕적 언설, 괴롭힘, 위협, 폭력 등을 가하는 행동.
젠더표현: 복장, 헤어스타일, 목소리 등을 통해 외적으로 젠더를 드러내는 방법.
Forshee “Homophobia and Transphobia”(2010)에서 재인용.
[<- 첨언하면, 2번은 그냥 포함했다는.. 뭐, 그런.. 이 글에서 유일한 인용이라는…]
03
낯선 타인을 트랜스젠더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 내가 나의 젠더를 확정하기 전에 타인이 나의 젠더를 의심할 수 있고, 이를 처단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 우리 몸은 어떻게 구성되며 구성된 몸은 어떻게 해석되나.
04
1973년 DSM에서 동성애 항목 삭제. 동성애를 정신병으로 진단하지 않기로 함.
1980년 DSM에 GID(Gender Identity Disorder, 성주체성장애, 성별정체성장애) 항목 추가. 트랜스젠더를 정신병 항목으로 확정.
아동 GID 항목(GIDC)을 두고 동성애혐오 논쟁 발생.
05
호모포비아의 외적 단서는 젠더.
젠더포비아는 트랜스젠더가 겪는 혐오폭력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전략인 동시에 많은 혐오폭력이 젠더화된 관습, 젠더표현과 관련 있음을 지시화기 위한 용어. 티내지 않으면 혐오폭력도 없겠지만 티내지 않기는 다른 말로 지배 규범적 젠더를 실천하는 것. 다른 말로 트랜스젠더로 살지 말라는 뜻이자 매우 빨리 성전환을 완료하라는 뜻. 하지만 이 말의 역설은, 다른 많은 역설과 함께 티내지 않으면 그 누가 변태여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 그리하여 피상적으로 파악할 수만 없다면 누가 변태인지 알 수 없고, 규범적 젠더를 실천하는 것 같은 사람이 퀴어이거나 트랜스젠더일 수 있다는 것. 바로 이런 이유로 끊임없이 표식을 찾음.
06
젠더폭력의 두 가지 층위
첫 번째, 트랜스젠더를 향한 혐오와 폭력
두 번째, 개인을 그에게 적합하다고 여기는 젠더로 환원하고 그 젠더에 적합하게 행동할 것을 강요하는 폭력.
이 둘은 다른 이야기가 아니지만 조금 다른 층위로 가는데, 첫 번째가 피상적으로 트랜스젠더만의 문제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면 두 번째는 젠더경합 개념과 함께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이 젠더를 경험하는 방식을 포괄해서 설명하는 경향이 있음. 두 번째 경향이 자칫 트랜스젠더 이슈를 희석하는 위험과 트랜스젠더가 겪는 젠더폭력과 비트랜스젠더가 겪는 젠더폭력을 동일시할 우려가 있다고 해도, 이 둘은 반드시 같은 수준에서 동시에 이야기할 필요가 있음.
07
혐오는 언제나 기획되고 예행연습을 거침. 즉 증오와 혐오폭력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우발적 사건으로 구성될 뿐. 아울러 기만된 사건으로 설명됨. 브랜든 티나/티나 브랜든처럼 가해자는 자신이 기만당했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피해자로 설명하고 피해경험자 혹은 이제는 고인이 된 자를 가해자로 모함함. 이 기만은 가해자의 헛소리가 아니라, 젠더규범을 위반하며 사회적 공감을 획득하면서 호소력을 지님. 채윤 씨 강의에서 “가해자는 대의명분이 있다.”고 했는데 가해자는 언제나 정당함. 그랬을 때 젠더란 무엇이며 몸과 젠더범주의 일치, 복장은 무엇인가.
08
외부성기로 연결되는 젠더. 젠더와 외부성기의 추정.
의료에서 젠더는 외부성기로 결정되고, 우리는 타인의 복장과 얼굴 형태 등으로 젠더를 결정하고 그렇게 결정한 젠더가 성기형태와 동일할 것이라고 가정. 이럴 때 우리 몸은 곧 외부성기인가.
인터섹스의 수술, 외부성기 형태, 행복. 의사가 행복을 결정하는 과정. 비-인터섹스만이 행복한, 이성애자되기가 행복으로 가는 과정. 행복은 규범적 몸을 갖추는 것, 규범적 행복, 행복한 규범.
규범적 몸 형태에 적절한 젠더 표현(복장, 머리카락 길이, 몸짓 등)을 덧붙여 규범을 지향할 때 비로소 행복을 지향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고, 행복의 근거가 됨.
09
트랜스젠더는 트랜스젠더로 패싱할 수 없고 오직 여자 아니면 남자로 패싱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패싱에 부합하지 않을 때, 폭력이 발생한다. “저 사람 여자야, 남자야?”란 질문은 트랜스젠더를 드러내는 전략일 수도 있지만 여자/남자라는 규범적 젠더를 환기하는 언설이기도 함. 아울러 이 사회에서 규범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조건은 여자/남자로 패싱하는 것이지 트랜스젠더로 패싱하는 것은 아님. 그런 의미에서 트랜스젠더로 패싱하는 것은 불가능함. 패싱할 수 없는 상황은 역설적으로 누가 트랜스젠더인지, 비트랜스여성/남성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며, 막연하게 타인이 비트랜스제라고 믿을 뿐 실제 타인이 트랜스젠더인지 비트랜스젠더인지 알 수 없다는 뜻. 그래서 인터넷 댓글에서 트랜스젠더 이마에 표식을 남겨라고 주장하며 블로그 리퍼러로그에 트랜스젠더 구별법이 찍히는 것. 끊임없이 구별하고 싶어 하는 것. 화학적거세처럼. 트랜스젠더도 있다거나 젠더는 둘이 아니다라는 인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가 트랜스젠더이고 비트랜스젠더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한지도 모르겠음. 아니, 혐오가해자에게 이 차이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무지를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바꾸려는 욕망, 무지를 인정할 수 없다는 불안 등이 ‘모호한’ 존재를 폭력의 대상으로, 고인으로 만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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