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인용, 관성적 반성

어떤 연유로 오랜 만에 정희진 선생님 글을 찾아 읽었다. 좋다.
첫 번째 인용은 지식을 권력화하고 사유화하는 태도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좋다. 사실 내가 반성할 지점이다. 나는 혹시나 이렇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래서 이 글이 좋다.
두 번째 인용은 연습이 부족한 내가 부끄러워서 골랐다.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한데 지금 나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반성만 반복하다보면 반성만 남고 연습은 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반성한다는 과시만 있을 뿐이다. 반성을 과시하지 않아야 할 텐데…(라고 다시 한 번 반성을 과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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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정치적으로 문제적인 비판에는 ‘뒤끝’이 있다. 혼자 오래 골몰한다는 의미다. 얼마 전 이 지면에 미국의 지원병제 문제를 지적한 스콧 펙의 징병제론를 소개했다. 어떤 ‘진보적 지식인’이 페이스북에 내 글을 두 가지로 비난했다. 하나는 내가 징병제를 주장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르는데 아는 척하지 않았으면”… 즉, 비전공자가 글을 썼다는 것이다(이후 다른 네티즌들의 문제제기로 삭제한 듯하다). 전자는 당연히 오독이다. 문제는 후자다. 이런 식의 비난, 질문, 해명 요구는 내가 20여년 동안 겪어온 일이다. ‘여성’은 나의 일부분임에도 세상은 나의 존재를 ‘여성’으로 도배한다.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이 ‘분’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의 공부 분야를 정한 다음, 영역 바깥의 글을 쓴다고 비난하는 이 ‘하느님’들은 누구인가?
(… 중략 …)
나 자신을 “~학자”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타인 특히 사회적 약자 집단에게 왜 이런 연구를 하느냐/안 하느냐는 지적은 인권 침해다. 남의 글을 내용이 아니라(이 경우는 그의 비판 내용도 틀렸다) ‘비전공’ 논리로 비판하는 것은 자기 허락을 받으라는 얘기?
이른바 통섭의 시대에 공부의 ‘유목민’에게 비전공자 운운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사람이 지식인인가? 그런 판관 노릇을 하고 싶으면, 이 정권에서 장관을 하시는 게 맞다. 공부의 의미를 독점하고 지식인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문지기들(gate keepers). 여기 들어오지 마. 그렇게 지킬 것이 없어서 겨우 지식의 문지기 노릇을 하는가?
경기든 연주든 모든 몸의 플레이어들은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한 부상과 실수가 있기 마련이다. 연습은 정신력으로 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연습된 몸으로 정신(적 실수)을 ‘없애는’ 방식이다. 연습, 연습, 연습. 그런 경지의 노력은 명예와 금전적 보장만으로 불가능하다. 삶을 사랑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다.
작가는 엄청난 양의 독서, 습작, 조사에다 삶의 매순간이 연습이다. 좋은 글을 빨리 쓰는 사람이 있다. 비결은 연습(치열한 삶)이다. 글 쓰는 시간은 연습을 타자로 옮기는 시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중략…)
하지만 연습을 많이 한 이들이 독자로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은 오만할 자격이 있다. 연습은 끝이 없는 개념이다. 외롭고 지루한 연습이 아무런 보상이 없을 수도 있는 삶을 기꺼이 선택한 이들이다. 이들은 이미 모든 것을 가졌다. 진실을 아는 자의 만족스런 불평이다. “천 번만 먹을 갈아보고 싶다. 그러면 내 가슴에도 진실만이 결정(結晶)되어 남을까?”(404~405쪽)

옛날기사: 2PM(재범) 사태, ‘순결’한 민족주의라는 폭력

요즘 1980년대, 1990년대 잡지들 중 몇 가지를 뒤적이고 있어요. 찾는 자료가 있으나 검색으론 찾을 수 없으니 하나하나 뒤지는 수밖에요. 덕분에 무척 재밌는 기사들을 발견하죠. 그럴 때마다 좋아하고 놀라고, 새삼스럽고 그래요.

01
가장 즐거웠던 순간 중 하나는 1997년에 정희진 선생님이 쓴 글을 발견했을 때죠. 아마 선생님도 잊고 계실 글이지 않을까요? 아닐 수도 있지만요. 지역주의-남아선호사상-국가균형발전-젠더-‘남성’권력을 키워드로 쓴 글이에요. 그때도 선생님의 글은 날카롭고 매력적이죠.

그런가하면 1990년대 중반에 나온 동성애 관련 기사도 발견했죠. 동성애인권운동을 시작하고 1~2년 정도 지난 1995년에 나온 글이니 무척 반가웠어요. 96년 즈음엔 동성결혼을 언급한 기사도 있더군요. 이런 흔적 찾기는 역사를 다시 상상하는 원동력이라 즐겁죠. 이런 기사가 우연히 하나만 실렸다면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반복해서 등장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죠. 기존의 역사를 다르게 설명할 수 있는 소중한 기록물이 되니까요.

1998년도 기사엔 마이크로소프트(MS)가 한국시장 점유율 100%를 노린다는 기사도 있더군요. 오오, 놀라워라. 현재 100%는 아니어도 99% 정도는 된다고 하니, 성공한 걸까요?

02
1980년대부터 등장한 르포, 기사, 세태비평집엔 “양키 고 홈”을 외치는 글들이 자주 등장해요. 갖은 욕설과 혐오로 미군철수, 때때로 “미군근절”을 주장하죠. 사람을 근절하자고 하니 섬뜩한데 이런 표현은 한두 명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아울러 미군과 미국 때문에 한국 문화가 타락한다며 걱정하는 기사와 책도 상당합니다. 1980년대부터 등장하는 민족주의 운동권의 전형이죠. 재밌는 건 백인과 흑인을 대하는 방식이 상당히 다릅니다. 백인보다 흑인을 비하하는 표현이 더 자주 등장하고, 더 쉽게 등장해요. 어떤 글에선 “백인도 아니고 심지어 흑인과 연애를”이라고 개탄합니다.

전 이런 혐오발화가 한국의 민족성을 만들려는 운동권 진영과 군사정권의 무/의식적 기획이라고 판단합니다. 순수한, 때 묻지 않은, 동방예의지국인 한국 이미지를 만들어 내려는 기획이죠. 확실한 기록물을 찾은 건 아니지만, “백의민족”이란 언설도 이즈음 등장하지 않았을까요? 용어 자체는 그전부터 있었다 해도 1980년대 들어 “백의민족”이란 표현이 의미를 가졌을 듯합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이런 논리에서 “여성의 순결”은 토대며, ‘여성의 가치’를 판단하는데 ‘순결’ 여부는 핵심이죠. 얽히고설켰어요. 그래서 민족의 순결을 걱정하시는 이들 상당수는 기지촌에서 발생한 폭력과 범죄에 침묵하거나 “미군철수”를 주장할 도구로만 활용합니다.

아울러 이런 분위기에서 애국주의는 운동권의 핵심 같습니다. 결코 한국을 비난해선 안 되는 분위기죠. 1990년대 초반 진보언론을 자처하는 잡지에선 한국 남성들이 군대에 가지 않으려 한다며 개탄합니다. 한국은 절대로 지켜야 할 대상이며, 애국주의, 민족주의와 같은 가치는 논의 자체가 불가능한 절대가치로 등장합니다. 물론 이 시기에도 민족주의, 집단주의를 비판하는 글들이 꽤 있지만, 주목받진 않아요. 그들 상당수가 페미니스트들이라 더 그렇고요.

2PM 사태를 접하며, 옛날 기사들이 떠올랐습니다. 아니, 옛날 기사를 읽으며 2009년도 잡지를 읽고 있는 건가 헷갈려 잡지 발행 시기를 확인했습니다. 제2의 유승준 사태죠. 아울러 전 이 사건이 성폭력피해경험자에게 ‘순결’, ‘진정성’ 여부부터 따지는 논리와 동일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여성’의 몸으로 민족의 순결을 재현하고 표현하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순결’과 민족의 순수성은 동일합니다. 재범이란 이는 이를 위반한 거죠. 그나마 그가 ‘남성’으로 통하는 몸/외형이기에 이 정도에서 그친 거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 상상하지 않으렵니다. 너무 끔찍하거든요.

한국의 언론 자유는 ‘김일성만세’에서 출발할 수 있음을 분명하게 지적한 김수영의 시가 떠올랐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표현의 자유가 상당히 위축되었다며 2MB를 원인으로 꼽고 있지만 과연 그럴까요? 굳이 원인을 찾자면, 2MB 때문에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거나 없는 게 아니라 집단주의 때문이죠.

안타깝고 화날 따름이에요.

정희진 “몸은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라 과정”

[다윈의 대답]을 읽고 소통(疏通)의 ‘疏’에 ‘멀어지다’는 뜻이 있는 것이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했다. 혹시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의미도 “침묵을 나누다”가 아닐까. 학제 간 소통은 물론, 자신과의 대화도 결국은 소통 대상과 멀어지는 일이다. 거리와 차이에 대한 인식만이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하므로 서운한 일도 아니다. 어떤 학문 분야에서나 모든 이론은 매순간 운동하는 세계를 영원으로 고정시키려는 욕망 행위다. 이론은 인식자와 대상, 언어가 우연히 단 한 번 만난 결과일 뿐이다. 대상을 관찰하는 그 순간에도 현실은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확실성에 대한 추구는 소통의 가장 큰 장애물일 뿐만 아니라 지성의 독이다.

성차는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성차는 수 천 년 동안 젠더화된 각종 제도와 실천, 법, 노동, 언어, 무의식, 섹슈얼리티 등이 상호작용하면서 체현된 인간-몸social body의 일부이다.

논쟁은 논쟁할 가치가 있는 의제에 한해서 논쟁적이다.

최소한 내가 아는 여성주의가 논하는 것은 남성과 같아지는 ‘평등’이라기보다는, 인간 몸의 차이의 해석을 둘러싼 권력 관계와 젠더라는 사회적 분석 범주가 구성되는 경계의 정치학에 관한 것이다.

혹시 타자는 동등한 인식자가 아니라 데이터로만 간주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주체는 그것을 기반으로 기존 이론을 해체하기보다 풍부하게adding 하는 데 혹은 자신을 성찰, 각성시키는 데 타자의 경험을 동원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 본성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역사적 산물이다. 체현embodiment, 훈육, 행위성, 수행성performance, 사회적 몸mindful body 등의 후기 구조주의 개념들은, 이러한 이분법을 넘어서서 사회구조와 인간의 변화 혹은 불변의 관계성을 동시에 설명하며, 이러한 인식틀에서 인간 본성 유무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간단히 말해, 인간 본성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선재적인 것이 아니라 늘 생성되는 과정에 있다.

농사는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환경을 통제하는 것으로(p.57), 농업의 발달은 인구 증가와 생태계 파괴의 악순환을 가져왔다. 게다가 농업은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는 경제 체제다.

원래 사실과 가치는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事實)은 언제나 사실(史實)의 산물이다. 사실의 발견은 인식자가 관계 맺고 있는 사회의 특정한 가치 체계로부터 나온다.

몸은 사회적 기억re-member이다.

-정희진, “몸은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라 과정”, [문학과 사회] 2007년 여름, 통권 78호, p.444-449

며칠 전, 오랜 만에 숨책에 갔다가, [문학과 사회]란 잡지에 정희진선생님 글이 실렸단 얘길 들었다. 이 소식을 전해준 “숨”은, 선생님의 첫 번째 문장을 읽고 책을 덮었다는 말을, 이유는 묻지 말라는 말과 함께 했다. 알 것 같다.

혼자 읽기가 너무 아까워서, 처음으로 스캔도 했다.

+어제 씨네21을 사려다가 더 이상 선생님이 글을 쓰지 않는다는 슬픈 소식을 접했다.

+이 책의 한 권을 읽어야 겠다. 채식주의와 관련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