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채식과 퀴어 범주의 경합

음식은 정체성을 어떻게 재구성할까? 혹은 무엇을 먹거나 먹지 않음을 선택하는 행위가 정체성을 어떻게 바꿜 수 있을까?
이를테면 이곳에도 적었듯, 내가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한 서사는 매우 간단하다. 어릴 땐 집이 가난해서 밥을 먹을 수 있는 게 다행이었고 다른 군것질 같은 건 불가능했다. 이런 배경에서 10대 시절 난 채식을 선택했고 채식이 몸에 안 좋다는 당시의 인식에서 나는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채식을 하는 건 내게 중요한 투쟁의 순간이고 채식이 얼마나 정치적 행위인지 그때부터 확인했다. 20대 시절에도 나는 여전히 채식으로 어떻게 살아갈까를 고민했고 많은 것을 채식 경험을 경유해서 이해했다. 그리하여 20대 중반 즈음 트랜스젠더로 나를 설명하기 시작했고 설명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에겐 당혹스러울 수 있겠지만 내겐 매우 ‘자연’스러운 정체화 과정. 그리하여 음식은 채식주의자라는 정체성 말고 다른 정체성/범주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요즘은 가죽퀴어(leather queer)가 비건채식을 한다면 그의 범주는 어떻게 변할까를 고민하고 있다. 가죽퀴어는 미국에서 한때 급진적이고 저항적 정치학의 주요 실천 양식 중 하나였다. 가죽퀴어의 역사 자체는 상당하지만, 이것이 1990년대 초반엔 급진적 퀴어 운동의 실천 방식 중 하나로 쓰이기도 했달까. 단지 급진적 운동의 방식으로서 가죽퀴어 뿐만 아니라 자신의 범주이자 정체성을 가죽퀴어로 삼는 사람도 많은데.. 만약 가죽퀴어를 자신의 주요 범주로 삼은 사람이 비건채식을 시작한다면 이 범주는 어떻게 변할까? (부연하면, 비건채식은 소위 식물성이라고 불리는 것만 먹을 뿐만 아니라 가죽 제품이나 동물을 이용해서 만든 제품을 입지도 않고 사용하지도 않는다고 얘기한다.) 가죽퀴어 범주와 비건채식 범주는 충돌하는 범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비건채식을 선택할 때 가죽퀴어란 범주는 어떻게 변할까? 혹은 어떻게 협상할까? 아직은 관련 논문을 찾아 읽은 건 아니고(일부러 안 찾았다) 그냥 머리 속에서 굴리며 상상/고민하고 있다. 아마도 음식이 정체성/범주를 구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만은 확실하겠지라고 가정하지만 이 가정이 옳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내겐 옳지만 다른 사람에겐 아닐 수도 있으니까.

주체, 범주, 죄의식

학삐리스러운 방식으로 문단으로 시작하자.
루이 알튀세르는 호명을 통해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구성한다고 설명했다. 경찰이 “어이, 거기 당신”이라고 부를 때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돌아보는 찰나, 그 개인은 국가/경찰의 이데올로기에 적합한/적법한 주체가 된다는 주장이다. 어떤 부름에 호응하는 행위 자체가 그 부름을 자신의 일부로 구성하는 행위, 혹은 그 부름에 자신을 맞추는 행위란 점에서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설명이다. 버틀러는 알튀세르의 설명을 확장하며, 주체는 양심과 죄의식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였다. 국가의 법을 대리하는 경찰의 호명에 호응하는 행위는, 해당 법에 자신이 조금도 위배되지 않음, 해당 법질서에 자신이 알맞게 살고 있음을 호소하는 행위기도 하다. 즉 법의 부름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음, 양심에 어긋남이 없음을 표출하는 방식이 ‘뒤돌아보는 행동’이다. 그러니 양심과 죄의식은 주체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다.
그런데 양심과 죄의식이 반드시 해당 이데올로기의 적법한 주체로 구성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양심과 죄의식은 지배 규범과의 관계에서 발생하지만, 그래서 지배 규범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도록 유도하지만 때때로 그렇지 않은 삶을 살도록 하는 동력도 된다. 비규범적 존재가 지배 규범에 적법한 존재로 살지 못 하는 삶의 양식으로 인해 어떤 ‘죄의식’을 느낀다고 해서, 그 죄의식은 규범에 투항하도록 하기보다 비규범적 삶을 강화할 수 있다. 그리하여 비규범적 존재 역시 양심과 죄의식으로 자신을 구성한다.
그러니까 원가족과 나의 관계에 관한 얘기다. 나는 원가족이 요구하는 이성애규범적 실천에 부합하지 못 하는 삶을 살고 있다. 번듯한 직장에 취직한 적 없고, 도대체 무얼 하는지 알 수 없는 공부를 하겠다며 빈둥거리고 있다. 원가족이 알고 있는 정보의 범위에서 나는 연애를 하지 않고 있으며, 그리하여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결혼할 의지도 없다. 나의 이런 행동은 원가족이 나를 비난하거나 어떤 식으로건 압박할 근거로 작동한다. 끊임없이 관련 압박을 행사하고 규범적 미래를 확언받고자 한다. 한때 나는 이런 압박이 그저 부당한 억압이라고 해석했다. 요즘은 그저 좀 슬픈 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원가족의 어떤 욕망이거나 원가족이 느끼는 어떤 불안이란 점을 짐작하기 때문이다. 나로 인해, 원가족은 ‘완전한 가족’은 아니라도 그럭저럭 어디 전시하기에 아쉽지는 않은 가족을 구성하는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나란 존재 하나가, 나를 제외한 원가족이 구성하고자 한 규범적 가족 구성 욕망을 실현할 수 없도록 한다. 내가 구멍이다. 내가 틈이다. 내가 결격사유다.
원가족의 욕망을 지배 규범적 욕망의 내면화란 식으로 말하고 싶지 않다. 이런 설명은 부당하다. 나 역시 기존 질서의 어떤 지점에 동조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마치 원가족의 욕망만 질서 유지 욕망이란 식으로 싸잡는 건 부당하다. 아울러 욕망은 이렇게 ‘규범 위반 vs 규범 순응’이란 식으로 간단하게 구분할 수 없다.
아울러 나는 원가족의 욕망과 그것에 부합할 의지가 없는 내 태도로 인해 어떤 슬픔과 미안함을 느낀다. 규범적 실천에 미안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어쨌거나 나와 오랜 시간 관계를 엮어온 어떤 집단의 욕망에 부합하지 못 한다는 사실에 미안함을 느낀다. 이 미안함은 어떤 의미에서 나의 양심을 자극하고 어떤 의미에서 죄책감을 야기한다. 이 양심, 이 죄책감은 원가족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의 방향, 내가 나를 범주화하고 있는 어떤 명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즉, 지배 규범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나의 죄책감은 나의 범주를 구성하고 강화하는 토대로 기능한다. 그리하여 나는 또 다른 의미에서, 지배 규범의 주체가 된다.
오늘이 아버지 첫 제사다. 제사는 음력이라 양력 기준으로는 이미 1년이 넘었다. 죽음과 애도가 또 다른 주체를 구성하고 있다. 좀 더 정교하게 글을 쓰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