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글자로 된 정신과 진단명

영화에서 보던 정신과 상담 장면과는 뭔가 달랐다. 의사가 아니라 내가 창문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의사가 방문을 등지고, 의사의 책상은 창문을 바라 보는 식이었다. 방문은 의사가 앉았을 때 왼쪽에 있었다. 통상의 병원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의사가 앉아 있는 상태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내담자를 확인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의사가 자신의 얼굴 표정을 숨길 수 있게 창을 등지고 앉는 형태가 아니었다. 내담자의 표정을 숨길 수 있는 구조였다. 그래서 나는 편했다. 의사의 표정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고, 나의 표정을 숨길 수 있어 좋았다.
의사와 나는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사명과 방법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검사 자체는 간단했다고 기억한다. 나는 무덤덤했다. 결과를 확인하기도 전에, 나는 내가 예상하는 결과가 나오리란 걸 알고 있었다. 걱정은 의사의 몫이었다. 의사가 더 걱정했다. 난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나의 정신세계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회 생활엔 큰 지장이 없기에 입원할 정도는 아니지만 간단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검사를 마친 다른 의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분위기가 어두웠다. 보조의사는 뭐라고 말을 했다. 나와 마주한 의사가 다시 내게 진단명을 말했다. ‘아, 역시 그렇구나.’ 중얼거리면서 그게 정확히 어떤 병인지 궁금했다. 진단명만 들으면 무슨 병인지 쉽게 알 것 같았고, 매우 가벼운 증상 같았다. 그저, 의사의 반응이 심각하여 내가 모르는 그런 증세가 있나 보다,라고 신경 쓸 뿐이었다. 그런데 진단명이 뭐였더라… 의사는 어떤 종이를 보여줬다. 종이엔 가장 심각한 병명 두 가지가 적혀 있었다. 내게 말한 진단명은 아래쪽에 적혀 있었다. 진단명만 읽으면 병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의사는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의사의 표정만으로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수술을 하겠느냐고? 머리를 절개하여 뇌수술을 하겠느냐고? 난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병이 진행될지 알 수 없지만 그냥 지내기로 했다. 수술도 하지 않고 약도 먹지 않기로 했다.
그때 바깥에서 소란이 일었다. 의사 둘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옆방 환자실로 들어갔다. 의사와 간호사, 환자 가족이 서둘러 병실 밖으로 나왔다. 병실에서 복도로 침대를 이어 붙였다. 의사는 바퀴가 달린 침대를 사용해서가 아니라 침대를 이어붙어 환자를 이송하려 했다. 컨베이어 벨트로 물건을 나르듯, 그렇게 환자를 옮기려 했다.
난 환자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의사와 간호사, 환자 가족이 침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그가 매우 위중한 상태라는 것을. 그리고 그 환자와 나의 진단명은 동일하다는 것을. 나의 상태가 좀 더 진전되면 그 환자처럼 될 수 있다. 알고 있지만, 수술할 의향이 없었다. 다행이라면 나의 진단명은 강제 입원에 해당하는 사유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 진단명이 뭐였더라…
나는 진단명을 듣고, 종이에서 그 글자를 봤을 때 몇 번이고 되뇌었다. 진단명을 잊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외웠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났을 때 진단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이 얕았을 땐 입술을 움직이며 진단명을 외우기도 했다. 이런 일은 모두 기억나는데 진단명은 기억나지 않았다. 꿈 치고는 생생했지만 하루 종일 잊히지 않는 그런 꿈도 아니다. ‘아, 꿈을 꿨지..’라고 상기해야만 떠오르는 그런 흔한 꿈이었다. 그런데도 두 글자로 이루어진 진단명이 궁금하다. 매우 흔한 명칭이었는데…

『젠더』: 상대방의 젠더를 판단하는 여러 기준들

미국정신의학회(APA)의 1974년 회의에서 성전환증(transsexualism) 세션에 참가한 한 의사는 mtf 트랜스섹슈얼이 유난히 예쁘고, 일반적인[비트랜스] 미인이 자신에게 유발하는 느낌을 환기한다면, 그 mtf 트랜스섹슈얼의 여성다움을 더 잘 확신한다고 말했다. 다른 의사는 트랜스섹슈얼이 정말로 자신이 주장하는 젠더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의사 자신에게 성적인 흥미를 일으키는지로 판단한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Kessler, Suzanne J. and Wendy McKenna. Gender: An Ethnomethodological Approach. Chicago &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118.
(번역은 대충 날림입니다. 이럴 때 사용하라고 만든 격언이 아니겠지만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세요.” *뻔뻔*)


한동안 분주했고, 별도의 읽을거리가 있어 『젠더』를 못 읽었다. 원래는 『젠더』를 6월까지 다 읽으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특별히 아쉬운 건 아니다. 어쨌든 어제부터 약간의 시간이 생겨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 글을 시작하며 인용한 구절은 예전에 다른 곳에서 들은 적이 있다. 2006년 여름이었나. 여이연에서 트랜스젠더 강좌를 열었는데 담당 강사가 위의 일화를 소개했다. 무척 인상 깊어 어디선가 몇 번 언급했지만, 출처가 명확하지 않아 인용하길 관뒀다. 근데 『젠더』에 나오는 일화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제 늦은 밤 지하철에서 이 구절을 읽고 꽤나 흥분했다. 흐흐.

이 책이 처음 나온 시기가 1978년이란 점, 그러니 1970년대 중후반에 이 책을 썼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당시엔 트랜스젠더를 진단할 공적 진료규범이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미국정신의학회에서 성전환증(transsexualism)을 성동일성장애(GID: gender identity disorder)란 항목으로 의료진단범주에 포함한 건 1980년이니 그전까진 설만 분분했다. 이런 시기에 몇 명의 의사들이 위와 같은 얘길 했다: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찾아왔을 때, 진짜 트랜스여성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자신에게 성적인 흥분을 일으키는지, 자신이 “환자”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지로 판단한다고.

의사들이 다소 노골적으로 표현했을 뿐 유별난 기준은 아니다.

작년 ftm 관련 다큐를 여성영화제에서 상영한 후 감독 및 출연자와의 대화 시간을 가졌을 때, 몇 명의 관객들은 출연자를 보며 “쟤는 좀 남자 같네.”라고 속삭였다. 난 이 속삭임과 『젠더』에서 전하는 의사들의 발언에서 어떤 차이도 찾을 수 없다. 하리수를 “여자보다 더 여성스러운”이란 수식어로 설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아가, 어떤 개인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구분하는 일상의 실천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여성”으로, “남성”으로 판단하는 방식은 위에 인용한 의사들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매혹을 기준으로 삼았고, 어떤 사람은 머리카락 길이를 기준으로 삼고, 어떤 사람은 걷는 방식이나 목소리 톤을 기준으로 삼는다. 전화를 걸었을 때 목소리만 듣고선 상대를 “여자”로 판단한다면, ‘내’가 “여성의 목소리”라고 판단할 자극을 받았다는 의미기도 하다. 이것이 위의 의사들이 성적 매력, 유혹으로 판단하는 것과 얼마나 다를까.

이런 구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매우 드물고 나 역시 이런 구분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니 이런 구분을 옳고 그름이나 잘잘못으로 구분하는 건 곤란하다. 이 말을 덧붙이는 건, 예전 어느 강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몇 번인가 의사의 사례를 언급했는데, 그 당시 강의실은 술렁이며 의사를 비난하는 분위기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그건 의사의 성차별적인 태도를 향한 비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술렁임, 의사를 향한 비난/비판은 용인할 만한 행동과 용인할 수 없는 행동을 구분하고 있단 점에서 유쾌하지 않다.

유쾌하지 않음, 불쾌한 건 아니라도 유쾌한 건 아닌 감정은 순전히 나의 경험 때문이다. 내 몸은 언제나 나를 배신한다. 낯선 사람을 만날 때 많은 이들이 나를 “남성”으로 판단했다가 내가 트랜스젠더인 걸 ‘알면’ 태도가 미묘하게 바뀐다. 혹은 나의 이름은 알고 오프라인의 모습은 모르다가 오프라인에서 인사를 할 때, 내가 “그 루인”이라는 얘길 할 때면 종종 놀라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놀람은 지극히 당연하다.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를 소비하는 방식에서 내 몸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글로 드러나는 나와 오프라인에서 드러나는 나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성질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놀람은 온라인이나 글로만 알던 사람을 오프라인에서 만났을 때도 빈번하잖아. 그저, 이런 놀람과 의사의 발언을 구분하고 놀람은 괜찮지만 의사의 발언은 나쁘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태도가 유쾌하지 않았다.

어제 지하철에서 『젠더』를 읽다가 이런 저런 고민이 떠올랐다. 요즘 다시 두드러진 고민 중 하나가, 20~30년 뒤의 내 모습이라 좀 심란하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