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퀴어, 교차점 모색

더 퀴어한 삶을 지향하는 경우는 많다. 비록 퀴어포비아가 만연한 사회에서 퀴어로 혹은 퀴어하게 산다는 것은 어떤 위험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위험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뜻은 아니다). 그럼에도 퀴어한 삶, 지금보다 더 퀴어한 삶은 많은 경우 좋은 의미로 통용된다. 지향해야 할 삶의 방향 중 하나로 독해된다.
지금보다 장애가 더 심각해지길 바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장애인 역시 장애를 세상을 인식하는 주요 토대로 사유한다고 해도, 지금보다 장애가 더 심각하길 바란다고 쉽게 말하진 않는다. 장애와 퀴어 모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긍정적 가치, 지향할 삶의 방향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더 퀴어하게’와 ‘더 장애가 심하게’는 그 의미가 같지 않다.
나는 장애 이슈와 퀴어 이슈를 분리해서 사유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장애-퀴어 이슈를 동시에 사유하기 위한 출발점은 앞서 쓴 지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더 퀴어하게’와 ‘더 장애가 심하게’가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 지점에서 장애-퀴어의 상호교차성을 모색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럼 어떻게? 물론 이건 앞으로 더 고민할 부분이고…

글 홍보: 인터섹스(간성), 만성질환, 장애-퀴어-페미니즘 / 리카패밀리

작년 12월에 나온 <여/성이론> 27호에 저와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글이 세 편 실렸습니다. 각 글의 주제에 관심 있는 분이 많을 듯하여 홍보합니다.

자세한 목차는 http://goo.gl/XwxO7 참고하시고요.
우선, 미국의 인터섹스(간성) 활동가 체릴 체이즈Cheryl Chase의 인터뷰 논문이 실렸습니다. 책임 번역자는 제이 님이고(제이 님이 번역을 워낙 잘 하셔서 문장 읽는데 어려움이 없을 거라 단언하고요) 기획은 리카패밀리에서 했습니다. 저를 포함한 네 분이 함께 세미나를 하는 모임이고요. 한국에서 인터섹스와 관련해서 충분한 논의를 살필 수 없는 상황이라 이 글을 번역하자고 논의했고 다행스럽게도 이번에 출판되었습니다. 기획의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획 의도::
  이  논문은 피터  헤가티가  미국  간성(인터섹스) 활동가  셰릴  체이즈와  인터뷰한 글이다.  셰릴  체이즈는, 본문에도 나와 있듯,  1990년대 초반 간성 단체  ISNA를 설립하고, 관련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자신의  삶과  활동  경험을  밑절미  삼아,  이  인터뷰  논문에서  체이즈는  간성의  경험, 페미니즘과의 접점, 퀴어운동과의 교차점 등을 논한다.
  한국에서  간성  논의는  사실상  부재한다.  의학에서  치험례를  다룬  논문  몇  편,  트랜스젠더  논의에서 부분적으로 언급하는 글 정도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간성 이슈는 매우 중요하다. 간성의 몸 경험은  규범적  인간  몸을  다시  사유할  것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이원  젠더-섹스,  의료기술과  젠더화된 몸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간성 이슈가 소재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까지  어떤  몸만  인간의  몸으로  사유했는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특정한  범주  존재의  삶을  어떻게  누락하고  은폐하는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간성의  몸이 ‘특이’해서가 아니라 간성의 몸과 삶을 사유하지 않는 현재의 인식체계가 문제라는 뜻이다. 헤가티와  체이즈의  인터뷰는  한국  사회에서  누락된  간성  논의에  중요한  참조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이  논문의  의의는  단순히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어떤  논문은  개인의  삶을  추상적  논의로  만들면서 구체적 삶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는 제공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간성 개념은 배울 수 있지만 간성의 삶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상상해야 하는지, 간성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 식이다. 본 논문은, 로쿠하나 치요의 만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성 아이에스』와 더불어 간성 이슈를 조금은 더 구체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이 글 번역은 리카패밀리가 기획했다. 리카패밀리는 장애-퀴어 이슈를 함께 공부하는 공동체로, 황지성, 제이(김진선), 전혜은(당근), 루인이 구성원이다. 세미나의 일환으로 본 논문을 읽었고, 이 논문이  현재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번역하기로  결정했다.  전문  번역은  제이가 담당했다. 제이는 장애여성공감에서 활동했고, 현재 한국여성민우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리카패밀리를 조금 더 소개하면, 장애-퀴어 이슈를 함께 공부하는 세미나 모임입니다. 장애-퀴어/트랜스젠더-페미니즘이 교차하는 지점의 이론을 공부하고 관련 글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제가 작년 여름에 출판한 “수잔 스트라이커” 소개글을 읽으셨으면 ‘장애-퀴어 세미나’ 팀에게 고맙다고 한 구절을 확인할 수 있을 텐데요. 같은 모임입니다. 스트라이커도 세미나 팀에서 같이 얘기를 나눈(이건 저의 열렬한 애호와 팀원의 열렬한 호응이 결합한 경우죠 크크) 이론가 중 한 명이고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선, 수잔 스트라이커 소개글 역시 리카패밀리의 성과기도 합니다. 아울러 이번에 출간된 책 <성의 정치 성의 권리>에 실린 저의 글 “괴물을 발명하라”에도 장애-퀴어 세미나 팀에게 고맙다고 했는데요. 같은 세미나 모임입니다. “괴물을 발명하라”의 일부분은, 이 세미나가 없었다면 결코 쓸 수 없었을 거고요.
리카패밀리 얘기를 하는 이유는, 만성질환 및 수잔 웬델을 소개한 글 두 편 역시 리카패밀리의 자장에 위치하기 때문입니다. (본인 동의 없이 막 이렇게 우기기.. 크크. ;;; )
수잔 웬델이 쓰고 전혜은이 옮긴 “건강하지 않은 장애인:만성질환을 장애로 대우하기”는 장애 이슈에 관심이 있건 없건 꼭 읽으셨으면 합니다. 흔히 장애를 사회적 범주로 해석하면서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태도를 어느 정도 경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인식론적 전환임에도 몸이 아픈 것 자체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남습니다. 바로 이 지점, 아픔, 손상, 고통을 다르게 의미화하는 것과는 별개로 몸이 아픈 현상 자체는 남고, 그렇다면 이 아픔과 어떻게 관계 맺을까는 여전히 고민인데 이것이 이 논문의 핵심입니다. 이 정도 설명이면, 아마 많은 분들이 자신의 경험과 연결됨을 깨달을 듯 합니다. 이를 테면, 장애나 아픔과 같은 경험이 아니라고 해도, 내가 퀴어고 퀴어라서 즐겁고 하는 것 등은 다 좋은데, 그럼에도 때때로 즐겁다고만 말할 수 없거나 자신을 부정하고 싶기도 하는 등 복잡한 감정을 느끼니까요. 이런 복잡한 고민에 어떤 위로를 주는 논문이 아닐까 합니다.
전혜은이 쓴 “수잔 웬델: 손상의 현상학자”는 수잔 웬델을 소개한 논문인데요. 간단하게 소개하면, 몸으로 쓰는 글이 무엇인지 그 진수를 맛볼 수 있습니다. 꼭 읽어보셔요.

[기고-인권오름] [나와 당신의 거리] 너무 먼 것처럼 느낄 뿐이다

눈치 챈 분도 있을 듯합니다. 요즘 제가 쓰는 글에서 어떻게든 엮으려고 애쓰는 지점은 퀴어와 장애 이슈입니다.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작년부터 둘의 연관 관계를 모색하며 짧게라도 글에서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의 가장 큰 영향은 2009년 가을부터 시작한 장애-퀴어 세미나고요. 굳이 기원을 찾아가면 트랜스젠더 이슈와 장애 이슈의 고차점을 고민하도록 한 화장실 이슈네요.
문제는 저 자신이 아직 충분히 정리한 상황이 아니란 점입니다. 저도 단편적 아이디어와 고민으로 둘을 엮어내고 있죠. 그래서 내용이 너무 서툴고, 저만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글에서 계속 언급하려고 하는데,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 안에서 충분히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한두 줄이라도 꾸준히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고민을 정리하는데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죠. 제 오랜 습관 중 하나는 고민을 속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펜과 손가락으로 한다는 것. 그래서 글을 쓰지 않을 때면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펜과 손가락이 움직이지 앟으면, 고민도 한두 문장의 단편으로 그칩니다. 크크. ;;;
암튼. 며칠 전 인권오름에 글을 하나 실었습니다. 욕심이 과해 망했지요. 엉엉. 마감 문제만 아니었으면 그냥 포기했을 법한 글입니다.
아, 그리고 이 글은 두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하나는 최초 기고버전. 청탁을 받고 원고 마감일까지 보낸 첫 번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전체 기획 내용을 담아서 수정해달라는 요청에 따른 수정 버전입니다. 기획 연제의 큰 주제는 “나와 당신의 거리”입니다. 전 글에서 직접 거리나 공간을 언급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거리나 공간을 느낄 수 있길 바랐죠. 하지만 이런 글은 내공이 장난이 아닌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작업!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망했죠. 크크. ㅠㅠ 그래서 거리 얘기를 분명하게 담았습니다. 아쉬운 점은 장애 이슈와 퀴어 이슈의 교차점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현재 상황에서 저의 한계입니다. 언젠간 좋아지겠죠, 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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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지난 4월 7일, 비가 내렸다. 라디오에선 난리였다. 우산을 꼭 챙겨야 한다고 했다. 교육청은 교장에게 휴교령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이유는 많은 이들이 짐작하는 한 가지, 방사능때문이다. 지난 3월 일본에서 지진이 나고 원전 사고가 발생하면서 다들 방사능 ‘전문가’가 되었다. 방사능 위험을 얘기하고, 체르노빌 원전폭발 사고를 환기하며 불안을 가중했다.

사고 초기 가까운 거리의 일본 거주민을 걱정하던 반응은 사라졌다. 방사능의 위험만 부각되었다. 사람은 사라지고 위험만 남았다. 그 위험은 질병공포, 장애공포에서 출발했고, 질병공포와 장애공포를 촉발했다. 나의 기억에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여파는 언제나 병과 장애인을 전시하는 방법으로 설명되었다. 암 발병률이 몇 % 증가한다고, 신생아 중 장애인이 몇 %라고 말하며 원전의 위험을 알렸다. 일본 원전 사고 이후, 어떤 신문에선 “기형아 낳을까 무서워요 … 둘째 포기”란 제목을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포털 메인에 실린 어느 기사는 일본을 “민폐국”으로 불렀다. 물리적 거리는 그대로인데, 공포와 위험은 그 거리를 좁혔다. 물론 사람 간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내’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땐 다 괜찮았다. ‘내’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자 불안과 혐오가 터져 나왔다. 장애를 ‘비정상’과 고통으로 치환하며 규범적이고 ‘건강’한 몸에 강박적인 반응이 보편적 정서로 유통되었다. 이런 반응에 나는 나의 몸을 떠올렸다. 트랜스젠더의 몸, 동성애자나 양성애자의 몸, 에이즈 감염인의 몸을 향한 사회적 혐오가 떠올랐다. 사회가 ‘다르다’고 가정하는 몸을 향한 혐오와 차별이 떠올랐다.


02
몇 달 전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된 내 아들 AIDS 걸리면 SBS가 책임져라!”는 광고가 일간지에 실려 화제였다. 방송을 보는 것만으로 ‘오염’되고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질병공포는 방사능 공포와 다르지 않다. 물론 하나는 ‘현실’이고 다른 것은 ‘망상’이라고 누군가는 구분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망상’일까? 어떤 사람에겐 방사능 위험이 현실이겠지만, 내겐 광고가 구체적 현실이다.

광고를 게재했던 집단과 관련 있을 누군가는 한동안 동성애를 “반대”하는 1인시위를 했다. 동성애를 “허용”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주장했다. 사람을 찬반으로 논할 수 있다는 상상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의 세상에서 퀴어는 사람이 아니란 뜻일까? 나는 우연히 1인 시위를 하는 사람 앞을 지나간 적 있다. 판넬에 적혀 있는 문구를 읽으며, 약간의 분노와 실소와 어이없음과 연민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실, 분노보다는 그저 그가 불쌍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가 느끼는 근거 없는 불안, 그 불안을 퀴어에게 덤터기 씌울 수 밖에 없는 그의 취약함에 그가 조금 불쌍했다.

그 사람 앞을 지나가며 나는 연민과는 또 다른 어떤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와 나는 전혀 모르는 사이지만 우리 사이의 거리는 너무 가까웠고, 또 너무 멀었다. 내가 트랜스젠더 활동가란 사실을 안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욕을 했을까? 아님 그저 얼어붙었을까? 내게 안전하지도 않지만 위험하지도 않은 그 거리를 걸으며 나 혼자 조금 심란했다. 그가 인간의 범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지나가는 그 자리, 나만 혼자 미묘한 기류를 느꼈다. 1인시위자에게 무관심한 사람과 1인시위자가 신경쓰이는 나와 1인 시위자는 서로 다른 공간을, 현실을 겪고 있었다.


03
방사능 위험 운운하는 언설을 통해 유포하는 장애혐오, 질병혐오는 장애인을 인간범주에서 배제한 현실이다. 광고 구절과 1인 시위 내용은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양성애자, 에이즈 감염인을 인간 범주에서 배제한 현실이다. 그 현실에서 장애인이나 퀴어가 존재하지 않느냐면 그렇지 않다. 배제한 존재를 환기하며 늘 그 존재와 함께한다. 방사능 공포가 유발하는 혐오는 장애인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는다. 광고를 게재한 이들은 퀴어와 에이즈 감염인을 강박처럼 떠올리며 불안에 떤다. 타인을 배제하는 이는 자신의 규범성, 자신은 ‘정상’이라는 항변을 입증하는 근거로서 배제할 대상을 끊임없이 소환한다. 배제는 그 대상이 세상에 두루 존재하도록 하며, 세상을 이루는 토대로 만든다. 불안과 배제는, 결국 이 세상을 이루는 토대가 소위 말하는 ‘정상’/규범이 아니라 배제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다른 말로, 이 세상은 소위 규범적/’정상적’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것이 아니다.

내가 1인 시위자 앞을 지나간 것처럼, 내가 간과하고 있는 이들이 어디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간과해서 그저 없는 것처럼, 나와 너무 먼 것처럼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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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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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몸 같은 건 없다.
루인(트랜스젠더 연구활동가, runtoruin@gmail.com)

  지난 4월 7일, 비가 내렸다. 라디오에선 난리였다. 우산을 꼭 챙겨야 한다고 했다. 교육청은 교장에게 휴교령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이유는 많은 이들이 짐작하는 한 가지, 방사능때문이다. 지난 3월 일본에서 지진이 나고 원전 사고가 발생하면서 다들 방사능 ‘전문가’가 되었다. 방사능 위험을 얘기하고, 체르노빌 원전폭발 사고를 환기하며 불안을 가중했다. 어느 신문에선 일본을 “민폐국”으로 불렀다.

  사고 초기 가까운 거리의 일본 거주민을 걱정하던 반응은 사라졌다. 방사능의 위험만 부각되었다. 사람은 사라지고 위험만 남았다. 그 위험은 질병공포, 장애공포에서 출발했고, 질병공포와 장애공포를 촉발했다. 나의 기억에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여파는 언제나 병과 장애인을 전시하는 방법으로 설명되었다. 암 발병율이 몇 % 증가한다고, 신생아 중 장애인이 몇 %라고 말하며 원전의 위험을 알렸다. 일본 원전 사고 이후, 어떤 신문에선 “기형아 낳을까 무서워요 … 둘째 포기”란 제목을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문득 오래 전 유행한 노래가 떠올랐다.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네 / 할아버지가 히로시마에 살고 계셨다네 / 내 왼손가락은 태어날 때부터 한 덩어리로 붙어있었죠 / 언제나 주머니 속에 숨어 있는 나의 왼손”(<새끼 손가락> 김승진 노래)

  ‘내’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땐 다 괜찮았다. ‘내’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자 불안과 혐오가 터져 나왔다. 장애를 ‘비정상’과 고통으로 치환하며 규범적이고 ‘건강’한 몸에 강박적인 반응이 보편적 정서로 유통되었다. 이런 반응에 나는 나의 몸을 떠올렸다. 트랜스젠더의 몸, 동성애자나 양성애자의 몸, 에이즈 감염인의 몸을 향한 사회적 혐오가 떠올랐다.

  몇 달 전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된 내 아들 AIDS 걸리면 SBS가 책임져라!”는 광고가 일간지에 실려 화제였다. 방송을 보는 것만으로 ‘오염’되고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질병공포는 방사능 공포와 다르지 않다. 물론 하나는 ‘현실’이고 다른 것은 ‘망상’이라고 누군가는 구분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망상’일까? 어떤 사람에겐 방사능 위험이 현실이겠지만, 내겐 광고가 더 구체적 현실이다. 현실이란 각자의 입장에서 구성되니, 현실과 망상이란 구분은 불가능하다.

  방사능 위험 운운하는 언설을 통해 유포하는 장애혐오, 질병혐오는 장애인을 인간범주에서 배제한 현실이다. 광고 구절은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양성애자, 에이즈 감염인을 인간 범주에서 배제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그 현실이 배제한 사람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배제한 존재를 환기하며 늘 그 존재와 조우한다. 방사능 공포가 유발하는 혐오는 장애인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는다. 광고를 게재한 이들은 퀴어와 에이즈 감염인을 강박처럼 떠올리며 불안에 떤다. 타인을 배제하는 이는 자신의 규범성, 자신은 ‘정상’이라는 항변을 입증하는 근거로서 배제할 대상을 끊임없이 소환한다. 배제는 그 대상이 세상에 두루 존재하도록 하며, 세상을 이루는 토대로 만든다. 불안과 배제는, 결국 이 세상을 이루는 토대가 소위 말하는 ‘정상’/규범이 아니라 배제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다른 말로, 이 세상은 소위 규범적/’정상적’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배제하는 대상을 ‘투명인간’으로 만든다. 규범의 불안한 토대를 타인에게 덤터기 씌운다. 이것이 지배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비규범적 존재가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다. 퀴어는 언제나 일상 생활에서 제 삶을 살아가지만, 이것이 문제될 것 없다. 퀴어의 몸은 뭔가 다르고, 규범적 이성애자의 몸만이 ‘건강’하고 ‘행복’하다는 강박이 퀴어의 삶을 고단하게 만든다. 우발적 사고만이 불안을 조성하지 않는다. 사고의 결과,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또 다른 ‘건강’ 강박이 낙인을 만들고, 몸의 위계를 만든다. 문제는 퀴어도 아니고 장애인도 아니고 또 다른 누군가도 아니다. 기준을 알 수 없고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어떤 ‘건강’ 강박, ‘규범’ 강박이 문제다. 퀴어만 아니라면, 장애인만 아니라면 ‘건강’하고 ‘행복’할 것이라는 근거없고 실체 없는 믿음이 문제다. 비장애인만, 규범적 이성애자만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 건강과 행복에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문제다.

  다시, 비가 내린다. 이번엔 어떤 비가 내릴까? 타인을 배제하는 공포가 반영된 비가 내릴까? 하지만 ‘건강’한 몸 같은 것, ‘정상’적인 몸 같은 것, 그런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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