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은 소통이다

어쩐지 양치기 소녀 같은 발언이라 두루뭉실하게 얘기를 하자면, 몇 년 전 떠들던 작업을 이제 슬슬 진행하고 있다. 물론 지난 몇 년, 그냥 놀지는 않았다. 그때도 분명 무언가는 했다. 차이라면 지금은 좀 더 직접적으로 관련 작업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특정 시간을 잡아서 그 작업을 하며, 어떻게 그 일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을까 싶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니, 제정신은 맞는데 그냥 앞뒤 구분을 못 했다. 뭐, 이렇게 사는 건 지금도 여전한 것 같지만. 냐옹.
글을 쓴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혹은 그래서 참 재밌는 일이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복받은 일이다. 그래서 참 어려운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곧 내가 배운 지식을 타인과 나눈다는 것이다. 이론이 곧 소통할 수 있는 언어여야 한다. 이론은 언어지 지식 자랑이 아니다. 하지만 이론은 지식 자랑이기 쉽다. 쉬운 소통의 수단이어야 하는데 지식 자랑이기 쉽다. 그래서 이론을 배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론 자체의 지식이나 앎이 어려워서만이 아니다. 그렇게 배운 것을 타인과 나눌 수 있도록 바꾸는 작업이 필요해서 어렵다. 그래서 퀴어이론 입문서, 철학 입문서 등을 집필한 저자는 모두 대단하다. 그리고 할 얘기를 양보하지 않으면서 쉽게 쓰는 저자는 더 대단하다.
아무려나 쉽게 특정 단어를 설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필요로 하는지, 얇팍한 지식으로 껄떡거리는 나의 태도는 참으로 한심하다.

한국에서 퀴어 이론 하기

늘 하는 얘기고 자주 하는 얘기지만 내가 처음으로 글을 출판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하던 그때 내가 뭐라고 글을 쓰고 또 출판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내게 글을 쓸 기회가 생긴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내게 글을 쓸 기회가 생긴 건 우연이었지만 트랜스젠더 이슈로 혹은 퀴어젠더 이슈로 글을 쓸 기회 자체는 우연이 아니었다. 트랜스젠더 이슈로 글을 출판하는 일은 이전의 활동이 만든 성과였다. 199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LGBT 인권 운동이 진행되면서 많은 연구활동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출판하기 시작했다. 때론 소식지를 통해, 때론 등록된 출판물로, 때론 기존 출판물에 투고하며 LGBT 이슈를 말했다. 그 당시 적잖은 활동가가 LGBT 이슈 혹은 퀴어 이슈로 글을 출판하며 한국에서의 LGBT 담론, 퀴어 이론을 구성하려고 애썼다.
예를 들어 지혜 선생님은 1990년대에 레즈비언 이론과 퀴어 이론을 번역 소개하거나 자신의 논의를 구성하며 한국에서의 퀴어 이론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2000년대 후반, 정말 끝내주는 퀴어 연구를 출판하고 있다. 이를 테면 가장 최근 출판된 논문 “역사와 기억의 아카이브로서 퀴어 생애  :  『나는 나의 아내다』(I Am My Own Wife) 희곡과 공연 분석”(http://goo.gl/ZrLiA2)은 퀴어 연구에서 자주 사용하는 개념어인 재현과 비동일시를 큐레이팅이란 새로운 개념어로 대체할 뿐만 아니라 큐레이팅이란 매우 흥미로운 개념을 만들어낸다. 아울러 퀴어 연구자의 감정이 매력적인 논문을 쓰는데 얼마나 중요한 동력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비교가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영어권 퀴어 이론에 ‘비동일시’란 개념어를 이론화한 호세 뮤노즈가 있었다면(작년에 고인이 되었다는 ㅠㅠㅠ) 한국엔 김지혜가 있다.
한채윤 님의 경우,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엔 <버디>란 잡지를 통해 그리고 또 다양한 출판물을 통해 활동가가 어떻게 탁월한 이론적 지형을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론이란 학제에서 배우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직접 활동하고 살면서 고민한 내용을 풀어나가는 작업에서 이론이 생산된다. 물론 한채윤 님의 경우, 대학원 정규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에 학제에서 요구하는 방식(!)의 이론적 세련됨은 부족할 수 있다(이것은 한채윤 님 자신의 평가인데 나는 이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채윤 님의 글을 읽으면 한국의 맥락에서 어떻게 퀴어 이론을 만들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 단적인 예가 <성의 정치, 성의 권리>에 실린 “엮어서 다시 생각하기: 동성애, 성매매, 에이즈” 아니던가.
이 두 분은 단지 예를 든 것 뿐이다. 1990년대부터 여러 연구활동가가 LGBT 이슈로 글을 출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었다. 2000년대 들어선 김순남 님, 우주현 님, 타리 님, 권김현영 님 등 한국이란 지역에서 퀴어 이론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고 여러 글을 출판하고 있다. 이런 이들의 노력이 내가 글을 출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2006년에 내가 글을 쓴 건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트랜스젠더 이슈로 글을 출판할 수 있었던 건 우연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엔 한국어로 쓴 퀴어 이론이 없다는 말을 누군가가 한다면,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명백하게 한국에서 생산되고 있는 연구를 전면 부정하면서 한국어로 쓴 퀴어 이론이 없고 한국 맥락에서의 퀴어 이론을 생산하기 어렵다는 토로를 한다면 이건 어떤 의미일까? 선배 연구자 혹은 시기적으로 앞서 연구를 진행한 연구자를 무조건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역사를 무시하면서 어떻게 탈식민주의적 지식을 생산할 수 있고,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맥락에서 이론을 생산할 수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남성성과 젠더] 관련 잡담

의외로 많은 분들이 책 [남성성과 젠더]를 사줬다. 어제 KSCRC 후원 겸 북콘서트 자리에서. 물론 북콘서트에서 책을 사겠다고 준비하고 왔겠지만, 그래도 후원콘서트장인데 책이라니… 크크. 나의 예상과 달리 많은 분이 책을 샀다. 그 중 몇 분은 콘서트에 참가한 필자에게 싸인을 받기도 했다. 덩달아 나도 싸인을 몇 번 했다.(사실 책 판매 담당이 나라서… 쿨럭.. ;; )
책은 이미 지난 주에 다 읽었다. 리뷰를 쓸까 말까 고민이다. 내가 공동으로 참여한 책이라 리뷰를 쓰기 참 멋쩍달까. 내가 참여하지 않은 책이라면 부담없이 리뷰할텐데…
아무려나 한 번 쭉 읽은 느낌은 대체로 좋다.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쉬움의 팔 할은 내 글에서 비롯하고. 그럼에도 ‘좋다’는 느낌이 든 이유는 이 책이 네 가지 주제를 아우를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즉, 젠더 이슈에 관한 책, 남성성에 관한 책, 퀴어이론에 관한 책, 트랜스젠더 이론에 관한 책으로 읽기에 좋다는 판단을 했다. 다른 말로, 젠더-남성성-퀴어-트랜스젠더 이론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중첩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혹은 트랜스젠더 이론을 다룬 책 혹은 트랜스젠더 이슈와 관련해서 읽을 만한 책이 거의 없는 한국 상황에서 이 책은 조금이나마 갈증을 달랠 수 있다. 젠더이론 혹은 페미니즘/여성학 입문서를 읽고 나서 다음 단계로 읽기에도 좋다. 번역서가 아닌 한국어로 쓴 책 중에서 퀴어이론서로 권할 만한 책이 매우 드문데, 권할 만한 책이 생겼다는 점에서도 좋다.
[남성성과 젠더]의 아쉬움이나 비판지점을 지적하려면 너무 많다. 그럼에도 조금 후한 점수를 주기로 했다. 어쨌거나 뭔가 하나 생겼다는 게 중요하니까.
… 책은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팔고 있습니다… 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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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면…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를 냈을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그땐 책을 낸다는 것이 어떤 건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냥 낸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었다. 지금이라고 책을 낸다는 것이 어떤 건지 아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모르겠다. 그럼에도 뭔가 다른 느낌이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여름이나 가을 초에 또 다른 책이 한 권(역시나 공저) 나올 예정인데 그땐 또 어떤 느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