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혐오, 권력

역사적 기록물을 추적하거나, 역사를 기록한 글을 읽노라면 두 가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하나는 혐오의 역사. 혐오는 지금도 존재하지만 그 시절 어쩌면 저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싶은 혐오 발화를 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발화는 결코 과거의 것이 아니다. 그 심한 발화는 지금도 재생산되고 있는 현재의 것이기도 하다. 혐오는 역사적 사건이고 재생산되는 담론이다. 트랜스젠더를 향한 혐오 발화, 바이를 향한 혐오 발화 모두 역사적 사건이다. 과거의 적나라한 혐오 발화는 지금 이 시기에도 유통되는 내용이다. 또 하나, 역사적 기록물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많은 경우 특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자신의 의견을 출판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의견을 글로 표현하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았거나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인종적, 계급적 토대가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지금 시점에서 접할 수 있는 과거의 많은 기록은 이런 정치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과거의 많은 혐오 발화는 출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발화다. 이 발화가 특정 집단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1970대부터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트랜스젠더 혐오 발화는 지금까지 물리적 형태로 흔적이 남아 있는 기록물을 쓴 사람의 발화다. 기록물을 남기지 못 한 사람의 의견은 지금 전해지지 않거나 간접적으로 전해질 뿐이다. 그러니 역사를 마주한다는 건 혐오의 역사성과 출판물의 특권/권력을 살피는 것이기도 하다. 어려운 일이고 재밌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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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리 님의 바이 강의를 듣고 떠오른 단상.

수도승 같은 글쓰기: 김학이, 나치즘과 동성애

김학이의 <나치즘과 동성애>를 읽고 있으면 연구를 수도하듯 하는 연구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느 정도 경건하고 감히 쉽게 읽으면 안 될 것 같은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열심히 자료를 찾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뻘소리하지 않고 성실하게 자료를 해석하고 배치하는 태도가 생생하다. 그래서 <나치즘과 동성애>는 단순히 내용만이 아니라 글이 풍기는 어떤 분위기만으로도 배울 점이 많다.
정말 잘 쓴 책이다. 정말 잘 쓴 글이다. 잘 쓴 책이자 글이다. 이러기도 쉽지 않다. 자신의 사유를 밑절미 삼아 새롭고 또 성실하게 쓴 글은 여럿 읽었다. 하지만 기록물을 발굴하고 읽고 해석하고 글을 쓰는데 있어 어떤 경건함을 느끼긴 또 정말 오랜 만인 듯하다. 자신의 관심이라곤 온전히 기록물 뿐이라서 그 외의 모습은 일절 느껴지지 않는 어떤 포스가 글에 넘친다. 그래, 포스가 가장 적절한 표현일 듯하다. 포스가 있다. 공부에 모든 것을 건 수도승과 같은 포스가 있다. (메예로비츠가 쓴 미국 섹스의 역사는 엄청난 내공을 느낄 수 있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책이지만 수도승과 같은 포스는 없었다.) 그래서 읽고 있으면 감동적이다. 한 줄 한 줄이 헛되지 않고 한 줄 한 줄 읽는 시간이 소중하다. 서둘러 다 읽는 것이 아까울 정도다.
이런 좋은 책을 읽으며 저자가 직접하는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니, 참으로 기쁘다. 나는 언제 이런 글을, 책을 쓸 수 있을까? 쓸 수는 있을까?
그나저나 언론사 기자가 작성한(혹은 보도자료를 정리한) 기사 말고 <나치즘과 동성애>로 쓴 서평/리뷰가 없네. 이 책으로 누군가가 서평을 쓸만한데, 정말 많은 얘기를 할 법한데 서평이 없다니 아쉽다. 내공 짱짱인 멋진 분들이 서평을 써주면 정말 좋을 텐데. 독자로서 정말 즐거울 텐데.

타자/퀴어의 역사쓰기

지난 주 수업 때 제출한 쪽글입니다. 매주 제출이라 매주 쓰고 있는데 일주일에 하나 씩 공개할지 꿍쳐 뒀다가 새로 블로깅하기 귀찮을 때 할까 고민이지만요.. 으하하. ;;;
암튼.. 고민이 얕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저도 수긍할 수밖에 없고요. 상상력이 얼어버려서 고민을 밀고 나가지 못 했거든요.. 하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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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8.화. 15:00-
타자/퀴어의 역사쓰기
-루인
타자가 처해 있는 “예외상태가 상례”(337)라는 건 “야만의 기록이 아닌 문화의 기록이란 결코 없다”(336)는 뜻이기도 할 터다. 타자의 역사, 야만의 기록은 지배 규범적 역사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배 규범적 역사는 타자(의 역사)를 억압하며, 그럼에도 타자를 그 자신의 토대 삼으며 구성한 시간이다. 문화의 역사는 지배자의 감성으로 구성한 역사이자(336) 타자를 예외 취급하며 구성한 시간이다. 그러니 타자는 별개의 존재 같지만 이 사회 질서에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는 이 사회의 규범을 구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하지만 마치 예외처럼 취급되어 별도로 인지될 뿐이다.
소위 여성이나 퀴어에겐 종종 “예전에 비하면 지금 많이 좋아지지 않았느냐”는 말을 한다. 예전에 비하면 좋아졌다는 식의 언설은 진화론적, 단선적 시간, 그리하여 열악한 과거, 현재와 단절된 과거를 상정한다. 하지만 이런 시간은 소위 얘기하는 남성에겐 적용되지 않는다. 남성은 늘 예전보다 지금이 ‘열악’하거나(“예전엔 남편의 말이 하늘 같..”) 남성의 현재는 과거의 남성이 아니라 다른 남성의 현재와 비교된다. 소위 여성이나 퀴어의 단절된 과거가 현재보다 열악하다고 가정하지만, 그때가 정말 지금보다 열악했다는 증거는 없다. 이미 기록이/역사가 없(다고 여기)는 존재기에 현재의 재현이 전부다. 그 과거는 구체성 없이 막연한 형태로 존재한다. 혹은 지배적 역사/문화의 기록에 누락된 형태로만 존재한다. 그리하여 그저 지금 이 순간 뿐이라서 “인용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존재…
물론 타자도 ‘역사’가 있다. 퀴어가 늘 듣는 질문 “넌 언제부터 네가 퀴어란 걸 깨달았니?”는 퀴어의 기원, 개인의 역사를 묻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비-퀴어는 받지 않는다. 그리고 이 질문의 대답은 대체로 어떤 규정에 따라 평가받는다. 규정된 서사로 구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재 자체를 의심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퀴어에게 혹은 타자에게 부여된 역사는 동적이고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것, 박제된 것이다.
하지만 역사가 지금시간의 구성 대상이고(345), “역사적 인식 주체가 투쟁하는, 억압받는 계급 자신”(343)이라면 역사는 타자의 맥락에서 재구성되어야 하거나 재구성될 수 있다. 비록 현재의 지배 규범으로 유통되는 역사가 지배자의 통치를 돕고 지지하는 역사, 지배하는 자에게 감정이입해서 기술된 역사라지만, 이 역사는 또한 타자의 역사란 점에서 그러하다(336). 그리하여 타자/퀴어의 역사를 인용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면, 퀴어/타자의 역사를 “성좌구조”(349)에 배치할 수 있다면?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인다. 1980년대 출판된 책을 지나 1970년대 출판된 책의 목차를 훑는다. 없고, 없고, 없다. 없는 와중에 드물게 있다. 드물게 불쑥 튀어나와 지금의 나와 조우한다. 1970년대에 출판된 퀴어 관련 기록이 2013년의 나와 불쑥 조우하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 과거가 지금 이 찰나에 ‘현재’로 등장한다. 그리고 나는 ‘나’의 옛시간과 만난다. 나는 내가 태어나지 않은 시간에 존재하고, 내가 태어나기 전의 기록은 지금 이 순간 다시 숨쉰다. 물론 이 기록은 단절 없이 지금과 매끈하게  접합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 기록은 타자의 역사, 혹은 역사를 ‘인용할 수 있는 것’으로 바꿔낸다. ‘구원’되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렇게 불쑥 튀어나온 역사의 흔적은 기존의 역사를 다시 인식하도록 하고 다시 쓰도록 한다. 그 한두 구절 속에 역사의 새로운 국면이 움트고 있다. 어쩌면 나는 역사에서, 과거에서 구원 혹은 희망을 찾는 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