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을 지양하기: Transsexuals’ Embodiment of Womanhood

mtf/트랜스여성이 여성성을 체화하는 방식을 다룬 논문을 읽었다. 다 읽고 난 느낌, 주디스 버틀러 지못미 -_-;;
D. Schrock, L Reid, and E. M. Boyd가 함께 쓴 논문 “Transsexuals’ Embodiment of Womanhood”(2005)는 mtf가 여성성을 체화하는 방식을 논한다. 그 방식은 크게 3가지 인데 훈련(retraining), 치장/꾸미기(redecorating), 의료적조치(remaking)이다. 각각의 내용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훈련은 자신을 여성으로 설명한 이후, 여성성 규범을 새롭게 배운다. 치장/꾸미기는 옷을 입는 전략, 화장하는 방법 등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트랜스여성은 ‘여성스러운 남성’이 아니라 여성으로 통하기 시작한다. 의료적조치는, 비록 수술이 핵심은 아니라고 해도 호르몬투여 등을 통한 몸 변화가 자신을 긍정하는데 큰 힘을 준다. 이 정도 논의로 끝난다면 읽는데 들인 시간이 아까웠으리라. 너무 뻔한 내용이잖아!
저자는 이 논의를 통해 몸을 변형하고, 꾸미는 과정이 몸이라는 물질적 경험인 동시에 주체성 형성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물질/몸과 주체성은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것이 이 논문의 핵심 의의다. 이 논문의 의의를 강조하기 위해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버틀러를 위시한 젠더 이론가를 비판한다. 저자에 따르면 버틀러를 비롯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는 언어/담론/문화와 물질/몸을 분리하고 언어 등만 중시하며 물질을 간과한다. 저자는 “예를 들어 버틀러와 비교할 때”, “버틀러의 주장과 달리”란 구절을 통해 버틀러를 수시로 소환하며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고 버틀러 류를 비판한다.
아… 버틀러 어쩔… 내가 버틀러를 지키고 말고 할 뭐도 아니지만… 이 논문을 읽다가 “버틀러 지못미”란 말이 절로 나왔다. 아울러 도대체 저자가 비판/비난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가 누군지 궁금했다. 아아.. 이렇게 쓰고도 학술지에 실릴 수 있단 말이냐!
버틀러를 비롯한 젠더/몸 이론가가 주장하는 바는 “물질과 문화가 별개며 문화/담론이 전부”가 아니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한도 내에선 그렇다. 사회문화적 해석을 통과하지 않는 물질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물질을 인식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해석실천이다. 아울러 물질과 해석/문화란 이분법 자체가 문제며, 이 둘을 끊임없이 분리하고 구분하는 실천 자체를 질문한다.
버틀러를 비판하는 논문을 읽을 때면, 종종 Schrock 등과 같은 방식으로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늘 궁금한데, 어째서 이런 해석이 발생하는 걸까? 이런 해석이 힘을 얻으며 반복재생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버틀러 본인을 비롯하여 적잖은 이들이 이런 해석을 비판하고 있음에도 이분법으로 논의를 수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언젠가, Schrock 등이 버틀러를 비판하기 위해 채용한 이론적 배경(현상학)으로 버틀러 식의 주장을 긍정하는 논문을 읽은 적 있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

Schrock 등의 논문이 버틀러나 포스트모더니즘 관련 논의만 좀 더 흥미롭게 논했어도 꽤나 재밌을 논문인데… 아쉽기도 하다.

트랜스젠더에겐 여성구금시설이 안전할까? : 메모

트랜스젠더와 구금시설 논의에서, 트랜스젠더가 머물 구금시설은 어디가 좋을까,라는 논쟁이 있다. 이 논쟁에서 최선은 아니지만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수술을 하지 않은 모든 트랜스젠더는 여성 구금시설에 머물도록 해야 한다는 제안이 있다. mtf지만 호르몬 투여만 했거나 의료적 조치를 하지 않은 경우, 남성 구금시설에서 성폭력 피해를 겪을 위험이 크다고 한다. (ftm은 말할 것도 없고.) 남성 구금시설의 경우, 힘의 위계, 남성성 위계를 규정하는 방법으로 성폭력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여성스러운 게이나 mtf/트랜스여성은 성폭력 피해에 가장 취약하다. 그래서 여성 구금시설이 이들에게 안전하다고 논한다.
하지만 과연 여성 구금시설이 트랜스젠더에게 상대적으로 덜 위험하거나 더 안전할까? 아니, 이런 식의 논의는 정말 안전할까?
여성 구금시설이 더 안전하다는 논의는, 여성은 남성보다 덜 폭력적이라는 지배적 젠더 규범을 근거로 삼는다. 이런 논의는 지배적 여성성과 남성성을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다소 위험하다. 미국 자료긴 하지만, 여성 구금시설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의 절반 정도는 교도관이나 공무원이 아니라 구금인이 가해자라고 한다. 물론 이 폭력의 성질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매우 논쟁적이다. 여성의 폭력성과 공격성이 어떻게 구성되고 소비되는가는 매우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니 여기선 생략. 다만 여성이 덜 폭력적이란 가정은 지배 규범적 여성성을 강화한다.
mtf 기준에서 여성구금시설이 안전할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ftm에게도 안전할까? ftm에게 남성 구금시설이 더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다. 여성 구금시설 역시 안전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는 여성 구금시설이 여성성을 강화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여성 구금시설은 여성성을 규제하려는 목적으로 세워졌다). 여성 구금시설이 ‘다양한’ 젠더 표현을 보장할까? 여성구금시설에서 남성스러움은 처벌의 일종이다. 그래서 ftm에게 여성구금시설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
그럼 트랜스젠더 만의 교도소가 따로 있어야 할까? 글쎄…
-간단하게 메모하려고 썼는데, 쓰다보니 써야 할 원고의 일부가 되었다.. 크크. ;;

[영화] 셜록 홈즈

[셜록 홈즈] 2009.12.27.일. 10:20. 아트레온 5관 7층 E-5.

영화가 끝나고, 출구로 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얘길 들었다. 워낙 목소리가 커서 듣지 않을 수 없었다. ㅡ_ㅡ;; 내용인 즉, 사람들이 깔깔 웃는데, 도대체 왜 웃는지 모르겠다, 유머코드가 다른 건가 싶다는 말. 두 분에겐 죄송. 하지만 깔깔 웃었던 인물 중 한 명이 나였다. 제목만으론 긴장감 넘치는 추리소설을 바탕으로 한 추리영화(서스펜스 스릴러 어쩌구 저쩌구 하는 영화?)일 거 같지만, 그렇지 않다. 사건과 추리가 등장하긴 한다. 하지만 내게 이 영화는 낄낄 웃으면서 즐길 수 있는 일종의 코믹물이었다.

원래 이 영화엔 관심이 없었다. 추리소설로서 셜록 홈즈 시리즈에 별 관심이 없어서. 어릴 때 셜록 홈즈 시리즈를 몇 권 읽으면서, 별다른 감흥을 못 느꼈기에 지금도 읽지 않고 있다. 그 시절 나는 루팡 시리즈를 좋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하하. 이 영화에 관심이 생긴 건, 토요일에 지구인 님의 얘기를 들으면서다. 이글루스 이오공감에 오른 어느 글이 한바탕 논란을 일으켰는데, 그 얘기를 해주셨다. 영화 [셜록 홈즈]를 “호모영화”로 표현하면서 발생한 논란이었다. 호모란 용어가 문제를 일으켰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퀴어 영화로, 게이 관계로도 해석할 수 있는 영화라니, 어찌 안 볼 수 있겠는가!

영화는 기대 이상으로 재밌다. 하지만 내게 이 영화는 추리영화가 아니다. 일본에선 추리, 환상, 미스터리와 같은 장르소설을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영화는 딱 엔터테인먼트 영화다. 부담없이 즐길 수 있고, 조조에 통신사 할인 가격이면 돈이 아깝지도 않은 영화. 추리가 등장하지만 굳이 추리 어쩌고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즐길 수 있는 영화.

사실 추리영화로 부르길 망설이는 이유 중 하나는, 결국 주인공만 사건의 전말을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추리가 과연 추리일까, 싶어서다. 소설에서건 영화에서건,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는 건 결국 작가와 주인공 뿐이다. 비록 독자와 관객이 대충 예측은 할 수 있다고 해도, 정보의 불균형은 상당하다. 뭔가 암시를 주긴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영화에서 등장하는 쥐꼬리가 무슨 의미인지, 뼈 조각이 무엇인지 사건의 전말을 주인공이 설명하기 전까진 결코 알려주지 않는데, 이게 무슨 추리람. 주인공은 추리를 하겠지만, 독자가 할 수 있는 추리의 정보는 매우 적으니 추리를 하는데 무리가 있다. 그러니 이제 독자와 관객이 할 일은 얼마나 재밌게 즐길 수 있는가가 관건.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충분히 재밌다. 굳이 추리를 할 필요도 없다. 추리는 주인공이 할 테니까. 나는 그것의 타당성을 검증하고, 엔터테인먼트란 장르 명칭답게 충분히 즐길 수 있는지만 확인하면 그만.

이 영화를 읽는 내내 깔깔 웃었는데, 그건 홈즈와 왓슨의 관계 때문이다. 왓슨 없으면 사실상 아무 것도 못 하는 홈즈와 홈즈를 떠나고 싶어하지만 결코 떠나지 않는 왓슨의 관계는 확실히 현대적 범주용어로 동성애 관계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하지만 1900년 전후로 등장한 소설에서 남성들 간의 관계는 대체로 이러했다. 우정과 애정 사이에서 매우 미묘했다. 그러니 이들 관계를 꼭 게이관계로 단정할 필요도 없다. (물론 영화가 2009년도에 나왔다는 점에서 1900년 전후의 소설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둘의 관계는 미묘하게 재밌다. 일테면 왓슨이 병원에서 퇴원하고 홈즈와 다시 만났을 때, 홈즈는 왓슨에게 다시 만나서 기쁘다는 말을 한다. 이 말, 뉘앙스가 매우 미묘하다. 설레는 고백이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멋진 부분은 따로 있다.

왓슨은 홈즈와 동행하다 결국 일시 감금된다. 구금시설에서 왓슨은 홈즈에게, 밤새 지난 7개월 간의 일을 메모한 일기를 다시 읽고는 자신이 미쳤다(확실한 건 아닌데, disturb인가 disorder인가 하는 용어를 사용한다, 확실한 건 아니다)고 결론을 내렸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이 매우 의미심장했다. 1800년대 후반, 1900년대 초반 유럽에서 동성애 관계는 일종의 정신병, 질병이었다. homosexuality란 용어는 정신병 진단범주로 등장했다. 물론 다른 많은 것들도 정신병이었다. 합리적 이성이라고 불리는 상상에서나 가능한 행동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정신병이었다. 의사와 탐정이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 과학적 이성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이 시기에 스스로를 정신병으로 부르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합리적 이성이라는 말 자체가 ‘정신병’과 같은 집착, 광기의 산물이란 의미일 수도 있고(‘이성적이여야 한다’는 집착), 비록 ‘합리적 이성’을 상징하는 둘이라고 해도 둘은 정신병으로 불리는 관계란 의미일 수도 있다. 뭐, 다른 의미일 수도 있지만. 정신병이란 표현은 홈즈에게 집착하거나 홈즈에게서 벗어나지 못 하는 왓슨 자신의 행동만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둘의 관계와 둘 모두를 설명하는 단서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 영화, 뻔한 안전장치를 사용한다. 왓슨에겐 메리, 홈즈에겐 아이린이 있다. 메리와 아이린은 왓슨과 홈즈가 이성애자라고 안심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둘의 관계가 더 의심스럽다. 뻔한 안전장치가 관계를 더 미묘하게 만들어버렸다. 이성애 규범에 따라 이성애자란 가면을 써야 하는 게이관계거나, 바이거나. 뭐, 대충 그렇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인물은 홈즈. 홈즈가 주인공이라서가 아니다. 홈즈가 할 줄 아는 건, 이성의 결정체라고 불리는 추리 밖에 없어서다. 심지어 자신보다 덩치가 더 큰 사람과의 시합에서도 이성적인 계산과 판단으로 승리한다. 정신은 육체를 이긴다? 하지만 홈즈는 왓슨과 같은 파트너, 자신의 일상을 보살펴 줄 사람이 없으면 거의 아무 것도 못한다. 방 구석에 콕 박혀, 방에서 총이나 쏘고 파리를 잡아 황당한(그래서 은근히 매력적인!! 흐흐) 실험이나 할 뿐이다. 그런데도 그걸 정당하게 말하고, 마치 대단한 것처럼 얘기한다. 이것은 합리적 이성이란 방패막을 사용하는 근대 남성성의 전형 아니던가? 홈즈의 모습은 근대적 남성성의 이상과 실상을 매우 잘 요약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아이린! 극중 인물 중에서 가장 멋있다. +_+

속상했던 관계는 메리와 왓슨. 왓슨은 홈즈와 메리 사이에서 계속 갈등한다. 영화에선 등장하지 않지만, 이 과정에서 메리는 속이 까맣게 탔겠지? 그런데도 끝까지 밝은 모습을 연기하는 메리의 태도는 당대 여성성 규범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왓슨은, 비록 홈즈와의 관계에선 홈즈를 보살피는 역할을 하지만 메리와의 관계에선 메리의 보살핌 혹은 이해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홈즈와 별로 다르지 않다. 거칠게 말하면 왓슨이야 말로 ‘점잖은 가부장’의 전형 아니던가?

암튼, 암튼. 영화는 부담없이 꽤나 재밌었다. 그리고 영화 말미에도 나오지만, 2편도 나오겠지? 노골적으로 암시했으니까.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