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르, 혹은 누구와 죽을 것인가

*영화는 3월 초에 봤고, 이 글은 얼추 열흘 전에 초안을 썼습니다. 계속 공개를 미루고 있었는데 더 미루기가 애매해서 이제야 조심스럽게 공개합니다.
3월 초 영화 [아무르]를 봤다. 간병하던 대상을 떠나보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봤으면 하는 영화다(장애 이슈로도 할 얘기가 많은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며 나는 리카를 떠올렸다.
영화 속 주인공 중 한 명은 병에 걸렸는데 병원에서 치료받길 거부한다. 그래서 파트너가 집에서 간병하는 상황이고, 직접 간병하는 삶의 고단함과 고민이 영화의 내용이다. 병원에 가지 않겠다는 환자의 선택. 나는 리카가 떠올랐다. 리카는 병원에서, 내가 없는 시간에 숨을 거두었다. 그것이 내겐 일종의 한으로 남아있다. 내겐 로망이 하나 있(었)다. 나와 살던 고양이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곳은 내 무릎이면 좋겠다는 로망. 리카가 내 다리 위에서 출산하려고 했듯 삶의 마지막도 그러길 바랐다. 하지만 리카는 병원에서 떠났고 나는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다. 이것이 한으로 남아 있기에, 바람이 아프다면 나는 입원을 시켜야 할지 집에서 간병해야 할지 갈등할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해도 안타까움으로 가득하겠지만.
그런데 리카를 병원에 둔 건 어쩌면 나의 이기심과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을까? 동반종을 간병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나는 리카를 집으로 데려가는 일이 두려웠다. 그래서 가급적 병원에 있길 바랐다. 단지 내가 집을 비우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일까? 단지 병원에 있어야 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어쩌면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서 도망친 것은 아닐까? 리카의 마지막이 내 무릎 위이길 바라면서도 정작 나는 죽음을 직접 목격하고 싶지 않다는 어떤 두려움에 떨었던 것은 아닐까? 리카가 온 종일 겪는 아픔과 고통을 곁에서 지켜볼 용기가 없어서 도망친 것은 아닐까?
영화를 보는 내내 그 당시의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그래서 환자의 파트너가 선택했던 일을, 알 것 같았다. 고통스러웠고 극장에 다시 한 번 가고 싶지만, 핑계도 좋지, 바빠서 못 가고 있다.
아버지가 오래 살길 바랐다. 아버지에게 애정이 있어선 아니었다. 건강 상태로만 본다면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뜰 줄 알았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먼제 세상을 떠났다. 안타까웠다. 이 안타까움엔 지금까지 말한 적 없는 어떤 욕망이 있다. 노인성 치매 혹은 알츠하이머가 유전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었다. 아버지의 어머니, 내게 할머니는 노인성 치매였다. 치매로 6년 가량의 세월을 살았고 삶을 마무리했다. 그래서 궁금했다. 노인성 치매는 유전일까, 아닐까? 유전이라면 직계 유전일까 한 세대를 걸러 나타나는 유전일까? 이런 궁금함이, 아버지의 장수를 기원하도록 했다. 만약 아버지도 노인성 치매 혹은 알츠하이머를 겪는다면 그에 맞춰 나는 내 노후를 준비하려고 했다. 노인성 치매에 걸렸을 때 주변 사람이 겪는 고통과 어려움을 알기에 민폐를 끼치지 않는 그런 미래를 준비하고 싶었다.
[아무르]를 보면서 다시 든 고민이지만(정확하게는 지혜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제기한 이슈지만), 나는 누구와 살 것인가가 아니라 누구와 죽을 것인가를 더 고민한다. 특정 신체 규범에 맞는 건강한 몸을 유지한다면 누구와도 살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성격을 비롯한 다양한 이슈가 있으니 누구나와 살 순 없지만 그래도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를 실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 혹은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를테면 내가 어떤 병에 걸렸을 때, 원가족을 제외하고 혹은 원가족을 포함해서 지속적으로 간병해줄 수 있는 사람이 내게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아마 없지 않을까? 아울러 나는 돈이 없기 때문에 전문간병인을 고용할 수도 없다. 간헐적으로 문병을 오거나 안부를 묻는 사람은 있겠지만 지속적 간병은 전혀 다른 문제다. 되살아나거나 ‘회복’한다는 보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한 더딘 시간, 그 끝이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을 견디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이곳에 오는 분, 이 글을 읽고 있는 분은 어떤가요? 원가족 말고, 애인 말고, 혹은 이 모두를 포함해서 자신이 아플 때 만사 제쳐두고 자신을 도와주고 간병하러 올 사람 혹은 어떤 상황에서도 어려움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물론 몇 번은 만사 제쳐두고 함께 하러 오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장기간 지속된다면? 몇 달 아니 몇 년의 시간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고통과 아픔을 일상에서 함께 나누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더 정확하게는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는지 자신이 없다. 이런 자신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이런 건 단언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그저 시간이 입증하는 일인데 어떻게 자신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니 나는 해줄 수 없으면서 누군가에게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농담으로 인간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있으니 나는 150살은 살 거라고 떠들곤 한다. 실제 그럴 수 있을진 장담할 수 없다. 자기만 조심한다고 사고가 나지 않은 건 아닌 현대 사회에선 예측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더구나 나의 노년이 어떤 모습일지 예측할 수 없어서, 나는 내게 알츠하이머나 노인성 치매가 생기기 전 내 삶을 깨끗하게 마무리할 수 있으면 하는 소박한/야심찬 바람이 있다. 하지만 언제 병이 생길지 알 수 없으니 이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바람이기도 하다. 병은 불길한 전조와 함께 오는 것이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훅, 찾아오니까. 그래서 내가 바랄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바람은 하나 뿐이다.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바람, 그리고 미래에 나와 함께 할 또 다른 어떤 고양이를 돌봐줄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 나의 병으로 인해 내가 책임지고 있는 고양이가 굶지는 않길 바란다. 나의 질병은 지저분하고 부담스러운 일이겠지만 고양이는 귀여우니까 누군가에게 생명을 위탁한다고 해도 큰 민폐는 아니지 않을까?
이런 글을 적으면 지금 혹은 나중에 만날 수도 있는 파트너에게 내 죽음을 의탁하겠다는 뜻으로 비춰질 수 있겠다. 그러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죽음은 의탁하겠다고 의탁할 수 있는 게 아니잖은가. 아울러 죽음을 의탁한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이 반드시 애인이나 파트너여야 하는 건 아니다. 혹은 파트너에게 배타적으로 의탁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삶의 관계를 그렇게 단순하게 만들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