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책, 알바, 그리고 묘한 인연

어젠 알바하는 책방에서, 4~5만 권 정도의 책을 새로운 가게로 옮기는 이사를 했다. 나를 포함, 열 명 정도의 사람이 책을 박스에 담아 새 가게로 옮겼는데… 난 그 정도 분량이면 이틀은 걸릴 거라 예상했다. 내가 이사할 때, 포장이사센터의 직원이 엄청 힘들어했기에 열 명 정도라도 하루는 무리라는 나의 판단. 그런데 하루 동안 지하와 지상의 책을 모두 새 가게로 옮겼다. 대충 11시간 정도 걸려서. 덜덜덜. 더 무서운 건 다 옮기고 나서도 표정이 여유로웠다. ;;; 알고 보니 그들 상당수가 출판사 창고에서 일했거나 헌책방을 운영하는 이들. 그들에게 4~5만 권은 많은 분량도 아니었을 듯.

이제 며칠만 더 일하면 이제 책방 알바도 끝이다. 그럼 새로운 알바를 찾아야지. 혹시 저를 활용하실 분은 서두르시길! 새 알바 구하면 그걸로 끝.

이사를 준비하고 책을 옮기면서 깨달았는데, 책방과의 인연이 참 길고 특이하다.

2004년 봄, 아는 이가 괜찮은 헌책방이 있다고 해서 따라 갔는데 그곳이 지금 알바를 하는 책방이었다. 그땐 지상만 있었고 지하는 없었다. 몇 번 놀러갔지만 자주 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새롭게 확장하는 지하에서 일할 알바를 구한다는 얘길 들었다. 그때 마침 알바 자리가 필요했기에 하겠다고 했다.

지하에 배치할 책을 나르는 일부터 시작했다. 지하매장이 처음 생길 때부터 헌책방에서 일을 한 인연. 그렇게 첫 계약처럼 다섯 달을 일하고 알바는 끝났다. 가끔씩 단기 알바를 하기도 했고, 내가 그곳에 놀러가 책을 사기도 하며 인연은 지속되었다. 지난 번에 살던 집으로 내가 이사할 땐 주인장이 짐을 옮겨주기도 했고.

그러다 작년 5월, 서너 달 정도 일한다는 조건으로 다시 알바를 시작했다. 서너 달이란 구두계약은 1년이 되었고, 그렇게 가게가 이사가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나는 그만두기로 했다. 그렇게 이사 준비를 하면서… 참 재밌는 게 지하매장을 새로 만들 때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곳으로 가게를 옮겨야 해서 지하매장을 접어야 할 때도 일을 하고 있었다. 참 묘한 인연이다 싶다. 하나의 매장이 생기고 철수하는 시기에 일을 하고 있다니… 그리고 새로운 가게로 이사하는 일도 함께 한다는 게 참 재밌다.

+새 가게 위치는, 기존 가게를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더 걸어가면 “신촌블르스”라는 고깃집이 나오는데, 그 가게가 있는 건물 지하입니다. 🙂

책 처분을 고민하다

하나의 일이 끝나면 다른 일이 입을 열고 나를 삼킨다. 일은 나를 씹어 삼키고 적당히 소화해선 배설한다. 그렇게 일에서 빠져 나온 나는 곧 다른 일에 먹힌다. 일테면 요즘 나는 매일 일정 세 개는 기본이고 일정이 너댓 개는 그냥 좀 바쁜 정도인 나날이다. 바쁜 게 문제가 아니다. 블로깅을 할 수 없어 아쉬운 게 문제다. 글을 쓸 수 없어 아쉽다. 글을 읽을 시간은 있어 다행이다!

이런 와중에, 이렇게까지 책을 사 모아서 뭐하나 싶었다. 이걸 다 짊어지고 갈 것도 아니고, 어떤 책은 평생 다시 안 읽을 건데 …. 책을 처분하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고민 중인 처분 경로는 세 가지 정도다. 첫 번째는 헌책방에 팔거나 그냥 넘기는 것. 판다면 적은 금액이나마 생활비에 보탬이 되겠지만 숨책이라면 그냥 넘기고 싶다. 워낙 고마운 곳이라서. 두 번째는 이곳 [Run To 루인]에서 착불로 무상배분하는 것. 세 번째는 아카이브에 기증하는 것. 세 가지 경로를 고민하는 건 책의 성격에 따라 처분할 방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여성학이나 섹슈얼리티/성, 퀴어 관련 기록을 꾸준히 모았다. 근데 그 중엔 개인소장보단 공공 아카이브에서 소장하는 게 더 나은 경우가 있다. 일례로 내겐 데니스 로드맨이 쓴 두 종류의 자서전이 있다. 하나는 한글로 옮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문이다. 그가 게이인지 크로스드레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자서전엔 퀴어와 관련해서 읽을 만한 내용이 적지 않다. 더구나 한글로 옮긴 책은 현재 절판. 몇몇 대학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지만, 한국의 대학도서관이 폐쇄적인 건 유명하니 이 책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다. 아니,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건 아니다. 주제아카이브에서 소장하지 않는 한 기록이 사장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반드시 소장하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다른 예로, 『역사의 사기꾼들』이란 책은 의료과학기술에서 발생한 오류를 다루는데, 비이성애, 트랜스젠더, 간성과 관련 있는 내용이 조금씩 있다. 퀴어나 섹슈얼리티에 초점을 맞춘 책뿐만 아니라 조금씩 언급한 책도 여럿 모은 결과다. 근데 굳이 이 책을 내가 소장할 필요가 있을까?

책을 소장하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어떤 기록을 필요로 할 때, 그 기록에 신속하게 접근가기 위해서다. 도서관이 있다지만 도서관개관시간은 때때로 기록에 접근할 수 없게 한다. 그것이 너무 불편해서 관련 기록들을 모두 모았다. 근데 모으다보니 소장해서 나쁠 건 없지만 굳이 내가 소장할 필요가 없는 기록들도 많더라. 어떤 기록은 독점하기보다는 공개하는 게 장기적으로 내게 도움이겠더라. 그 기록을 나 혼자 가지고 있으면 혼자 즐겁겠지만 충분히 활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미래는 모른다지만 내가 데니스 로드맨 자서전으로 글을 쓸 일이 과연 있기는 할까? 잠깐 언급하는 일은 있어도 그의 자서전을 분석할 일은 없을 터. 하지만 그 기록을 자료로 멋진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기록을 공개하는 게 결국 내게도 도움이다. ‘나 자료 이 만큼 있다’는 자족감은 공허할 뿐이더라.

다른 한 편, 몇몇 소설들은 아마 평생 다시 안 읽을 가능성이 크다. 내가 과연 『일식』을, 『애니멀 크래커스』를 다시 읽을 일이 있을까? 혹은 『핫뮤직』 과월호를 굳이 내가 소장한다고 해서 다시 읽을 일이 있을까? 차라리 그 책을 읽고 싶은 사람에게 유통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방식이 어떤 형태건 간에 유통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더 이상 책을 둘 자리가 없어 이사를 고민해야 한다면 더욱더!

이렇게 작심했을 때 얼른 처분하면 좋겠지만, 나의 진로가 불투명해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긴 하다. 흐흐. ㅡ_ㅡ;; 진로에 따라 소장할 필요가 있는 책과 유통해도 무방한 책이 나뉘기 마련이니까. 더 큰 문제는 이사를 가기 위해 짐을 정리하지 않는 이상, 선별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이렇게 쓰면 책이 상당히 많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단행본만 얼추 사천 권도 안 된다. 책 자체가 많은 건 아닌데 방이 8평도 안 돼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다;;;;;;;;;;;;;;;;;;;;;;;;;;;;;;;;;

내년 초까지 2/3 수준으로 줄이는 걸 목표로 하자!

+
사실 더 줄이고 싶고 굳이 소장하지 않아도 좋을 자료들이 더 있긴 하다. 처분 방법이 고민이라 망설이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확 줄여야지.

숨책 알바, Dennis Rodman + 등등

01
어제 날씨 덕분에 컨디션이 안 좋다고 했는데, 아니었다. 글을 쓰고 나서, 페퍼민트를 마시다가 깨달았다. 뭔가 상한 음식을 먹은 거라고. 그래서 독성을 분해하느라 심한 두통을 앓고 있는 거라고. 약국 가서 약을 사 먹었더니 괜찮다. 재밌는 건, 속이 메스껍고 두통이 심하다고 하니, 소화불량과 관련한 약과 두통약을 처방하면서 두통약을 가리키며, “30분 정도 나른할 수 있다”고 했다. 알바 가는 길이라 두통약은 안 먹었는데 알바 끝날 즈음 속은 괜찮은데, 玄牝에 돌아가서까지도 두통은 심했다. 약 먹고 일찍 자야지 하는 심보로 두통약을 먹었는데, 웬걸 약을 먹고 나니 오히려 쌩쌩해지더라는. ;;; 보통 때 같으면 잠이 쏟아질 시간까지 잠이 안 왔고, 아침엔 전에 없이 무척 개운하게 일어났다. ;;; 예전에, “잠이 안 오는 비염약”이지만 부작용으로 잠이 올 수 있는 약을 먹었다가 하루 종일 졸음에 취해 비몽사몽으로 지냈던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제 루인은 잠이 오는 약을 골라서 먹어야 잠이 안 온다는 결론? 흐흐흐 -_-;;

02
사흘간의 숨책 알바가 어제로 끝났다. 별로 하는 일도 없는데 알바비를 너무 많이 줘서 항상 미안하다. 그러니까 노동 강도에 비해선 엄청 센 알바비고, 평균적인 알바비에 비춰도 상당히 세다. 일본에서의 알바비를 떠올리면 될 듯. 그러면서 세 권의 책을 샀다. 한 권은 데니스 로드맨(Dennis Rodman)의 자서전 비슷한 책인 [Walk on the Wild Side], 다른 한 권은 [not simple]

03
데니스 로드맨이 누군지 알게 된 건, 아마 작년 즈음일 듯 하다. 모씨의 모 책을 제본하면서;;; 책 말미에 이 사람과 관련한 부분이 있어서 누군가 하고 찾다가 알았다. 누군가 했더니

[#M_ 이런 사람이네.. | 농구선수.. |


_M#]

스포츠 자체에 관심이 없거니와, 체육시간엔 가능한 한 광합성을 했고, 체육필기성적이 전교 35x명 중에서 35x등을 했던(그래도 꼴찌는 아니었다, 음하하 -_-;;) 루인이라, 이 사람이 누군지 알리가 없다. 그런데 왜 이런 농구선수의 자서전 비슷한 걸 샀느냐고? 그 모씨의 책에서 이 사람을 왜 기억하냐고?

[#M_ 왜냐면.. | 이 사진들 때문.. |


자서전 비슷한 이 책에서 로드맨은 “YES, I’M GAY” / “I’M STRAIGHT”(174)[나는 게이이다. 나는 이성애자다.]라고 말한다.

다양한 의미에서 흥미로운 책인데, 한국의 헌책방에서 출판본이 있을 때가 또 언제 있으랴 싶어 망설이지 않고 샀다. 참, 그 모씨의 모 책은 Leslie Feinberg의 [Transgender Warriors].
_M#]

+
작년 메가박스에서 일본영화제를 할 때 꼭 읽고 싶었음에도 표가 없어 못 읽은 영화가 있었다. 근데 이번에 개봉한단다. 꺅꺅. 그동안 DVD도 안 나와서 안타까웠는데, 너무 좋아하고 있다. 우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