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은 소통이다

어쩐지 양치기 소녀 같은 발언이라 두루뭉실하게 얘기를 하자면, 몇 년 전 떠들던 작업을 이제 슬슬 진행하고 있다. 물론 지난 몇 년, 그냥 놀지는 않았다. 그때도 분명 무언가는 했다. 차이라면 지금은 좀 더 직접적으로 관련 작업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특정 시간을 잡아서 그 작업을 하며, 어떻게 그 일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을까 싶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니, 제정신은 맞는데 그냥 앞뒤 구분을 못 했다. 뭐, 이렇게 사는 건 지금도 여전한 것 같지만. 냐옹.
글을 쓴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혹은 그래서 참 재밌는 일이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복받은 일이다. 그래서 참 어려운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곧 내가 배운 지식을 타인과 나눈다는 것이다. 이론이 곧 소통할 수 있는 언어여야 한다. 이론은 언어지 지식 자랑이 아니다. 하지만 이론은 지식 자랑이기 쉽다. 쉬운 소통의 수단이어야 하는데 지식 자랑이기 쉽다. 그래서 이론을 배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론 자체의 지식이나 앎이 어려워서만이 아니다. 그렇게 배운 것을 타인과 나눌 수 있도록 바꾸는 작업이 필요해서 어렵다. 그래서 퀴어이론 입문서, 철학 입문서 등을 집필한 저자는 모두 대단하다. 그리고 할 얘기를 양보하지 않으면서 쉽게 쓰는 저자는 더 대단하다.
아무려나 쉽게 특정 단어를 설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필요로 하는지, 얇팍한 지식으로 껄떡거리는 나의 태도는 참으로 한심하다.

하루: 발설, 소통

몇 해 전, 아침 9시에 문을 여는 교보를 본 적이 있다는 기억을 믿으며 아침 일찍 교보문고에 갔다. 오늘 있는 수업과 관련해서 참고할 책이 있어서. 발제를 할 것도 아니고 무슨 발표를 할 것도 아니면서 관련 서적을 읽고 싶었다. 물론 그 책에 실린 저자의 한 명이 양가감정을 일으키는 인물이기 때문에 뭔가를 확인하고 싶어서기도 했다. 9시 개장 시간에 맞춰 들어갔다가 얼른 학교에 가야지 했다. 8시 50분 즈음 교보에 도착했을 때, 입구엔 9시 30분 개장이라는 표시가 있었다. 이런. 지하철역에 있는 차디찬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책을 사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읽으며, 무난하다고 궁시렁거렸고, 지도교수이자 학과 주임교수인 선생님에게 잠깐 들렸다. 사무실에 들어서면, 느껴지는 어떤 낯설음. 지난 일 년 동안 거의 매일 머문 곳인데, 낯선 익숙함 같은 것이 있다. 언젠가 사무실에서 떠나는 날이 있다면, 떠나고 나서야 익숙해지겠지.

글을 마저 읽고 12시에 있을 학과 운영위원 선생님들 회의를 준비했다. 은근히 신경 쓰이고 긴장한다. 글은 (과장해서) 동시에 다섯 편도 읽을 수 있지만 사람과는 한 번에 한 사람 이상과는 얘기를 나눌 수 없는 루인이기에 이런 회의 자리는 신경이 잔뜩 쓰인다. 동시에 여러 선생님이 얘기를 하면, 몸은 퓨즈가 나가버린다.

몇 분의 선생님이 도착했을 즈음, 아뿔싸, 미쳐 준비하지 않은 것을 발견. 서둘러 건물에 있는 매점에 갔다. 그리고 반가운 만남. 기쁨. 하지만 미안함.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만났음을 실감하고 좀더 얘기를 나누지 못해 아쉬워한다. 늘 이런 식이다. 갑작스러운 만남 앞에선 언제나 헤어지고 나서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9년째 만나고 있는 친구를 빼면(루인에겐 오랜 시간이란 것이 중요하다, 곧 관련 글을 쓰겠지?), 늘 만났다는 사실을 깨닫기 까지 시간이 걸린다. 왜 그럴까.

회의는 더욱더 정신없이 지나간다. 퓨즈가 나가고 정신을 못 차릴 즈음 회의는 끝나고 곧바로 수업 준비. 주교제 외에 몇 권의 책을 더 챙기지만 어차피 수업시간엔 말을 별로 안 할 걸 안다. 수업에 적응하기까지 몇 주의 시간이 필요하니까. 다행인 건 선생님도 같이 듣는 사람도 모두 이미 안면이 있다는 정도.

수업 시간에 한 번 정도 얘기를 했지만, 저녁 5시, 수업이 끝났을 땐, 얼이 빠지고 진이 빠진 느낌. 토요일에 있을 발제 준비를 하나도 안 했기에 준비를 해야지 하면서도, [Run To 루인]을 연다. 뭔가 안정이 안 될 땐, 뭔가를 쓴다. 쓰는 것. 쓴다는 행위. 쓰다보니 포스팅 세 개는 될 분량의 글을 하나에 몰아넣는다. 발설. 말하고 싶다는 욕망만 남아 있는 상태. 정작 글을 쓴 본인은 그 글을 다시 읽지 않는다. 끔찍하니까.

그렇게 “열심히 한다는 것, 성실하다는 것: 두 가지 이야기“를 쓰고, 트랙백을 보내는데, 실패. 예전에 키드님 블로그에서 네이버로 트랙백을 보내면 안 되는 경우가 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보내긴 보냈는데, 도착하지 않는 트랙백. 어디 즈음에 머물러 있을까? 문득 그 트랙백이 루인 같다.

그렇게 쓰고도 모자라 또 한 편의 글을 쓴다. 그러다 문득 점심 외엔 밥을 먹은 적이 없단 걸 깨닫는다. 배고파…. 하지만 수업이 끝났을 때, 밥을 먹을까 하다 귀찮아서 관두기로 했었다. 玄牝으로 돌아오는 길에 단골 과일가게에 들린다. 주인이 최고로 맛있다는 귤을 사서 들어온다. 가격은 조금 비싸지만, 감동적인 맛을 누릴 수 있는 과일가게. 이곳으로 이사 온 이후 항상 가는 곳. 그곳 과일만 먹을 땐 몰랐는데(그곳이 비싼 곳인 줄도 몰랐고) 다른 곳에서 과일을 사먹으면 그곳이 얼마나 맛있는지 새삼 깨닫는다. 단골이란 게 이런 거다. 익숙해진다는 게 이런 거다.

또 글을 쓰고 있다. 이렇게라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이 계속해서 쓴다. 결국 발설의 욕망일 뿐. 쏟아 내고 싶다는 욕망만 남아 있음을 다시 확인한다. 며칠 전, 누군가가 이상형을 물었다. 망설임 없이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외모는 전혀 상관없느냐고 물었다. 어차피 외모는 익숙해지기 마련이라고 답했다. 물론 평생을 살아도 매일 같이 감동적인 외모도 있을 수 있겠지만, 결국 외모는, 외형은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소통의 욕망이 강한 루인에겐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소통한다는 것이 루인의 방식으로 얘기한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눴는데, 상대방이 루인이 가장 뜨악해 하는 방식으로 얘기를 한다면 좌절할까?

루인과 같은 채식주의자여야 한다고 했지만 결국 이것도 상대방이 채식주의자인가 하는 여부보다는 이와 관련해서 소통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에 그 글을 쓰고 난 후. 별자리 책에 루인은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만 남는 경향이 있다고 했는데 결국 그런 걸까?


오늘 하루도 이렇게 편집한다. 이렇게 루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편집해서 ‘사실’인 양 얘기한다. 현실이란 것도, 환상이란 것도 결국 같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