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범주의 의미

범주를 고민한다는 것은 ‘나는 이런 존재야, 그러니 난 너와 달라’라고 말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범주를 고민함은 존재를 혹은 우리 각각이 세상과 부딪히는 방식을 구획하는 권력을 사유하겠다는 뜻이다. 문제의 핵심은 ‘나는 이런 범주니까 날 제대로 불러’가 아니다. 핵심은 내가 무슨 변태건 상관없이 특정 틀거리에 날 끼워맞추고 그것으로 박제하는 권력 작동이다. 그러니까 내가 트랜스젠더기에 누군가가 날 트랜스젠더로 제대로 불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특정 방식으로 트랜스젠더를 박제하고 그 형상에 내 삶과 행동도 모두 끼워맞추는 인식 체계가 문제다.
비슷하게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나’를 제외한다고 해서 나를 ‘배제’하는 것, 그리하여 무의미한 논의라고 말하는 건 문제가 있다. 특정 용어만 반복해서 사용한다면, 논의에서 그 용어의 역사적 맥락에 맞게 잘 설명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게 더 중요하다. 이를 테면 호모포비아란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단순히 이 용어가 트랜스젠더를 배제하기에 문제라고 비판하며 호모포비아와 트랜스포비아를 병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때때로 난감함을 야기한다. 그것보다 호모포비아라고 했을 때 이 용어를 사용하는 글이 이 용어의 개념과 역사를 얼마나 잘 반영하면서 논의를 전개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호모 개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동시에 점검해야 한다. 호모포비아만 사용하면 안 되고 호모포비아와 트랜스포비아를 같이 사용해야 한다면, 이런 용법은 동일한 논리에 따라 바이를 배제한다. 그럼 퀴어포비아는 어떨까? 퀴어포비아를 사용하면서 동성애자만 혹은 비트랜스-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만 떠올린다면 퀴어포비아를 사용한다고 해서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포괄어를 사용하는 것은 더 많은 책임과 사유를 요구한다.. 물론 퀴어가 모두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대표할 필요가 없음도 분명하지만.
…그냥 이것저것 잡담을 조금 덧붙였다.

생명연장 기술인 성전환? 평균의 의미

근래 몇 번 진행한 강의에서 되풀이한 내용이 있다. 나를 트랜스젠더로 설명하며 주변 지인에게 조금씩 말하던 시절, 한 지인이 내게 말했다. 호르몬은 절대 하지 말라고, 호르몬 하면 몸이 많이 아프고 일찍 죽는다고. 트랜스젠더는 일찍 죽는다는 말을 환기시키는 언설.. 이 언설로 여러 얘기를 할 수 있고 강의에선 좀 다르게 풀었는데(그 얘기는 수업 기말페이퍼 아이디어라 블로그엔 나중에 쓰는 걸로..;; ) 여기선 그와 다른 얘기를 하고 싶다.
나이듦과 관련한 글을 읽고 있노라면 종종 나오는 얘기가 여성이 남성보다 오래 산다는 구절이다. 이건 인구통계적 평균에도 부합한다. 소위 말하는 여성의 평균 수명이 남성보다 길게 나오니까. 그렇다면 만약 내가 의료적 조치를 시작한다면 이것은 생명연장의 기술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른바 남자의 몸에서 여성으로 의료적 전환을 겪는 것이며 여성의 평균 수명이 남성보다 길다면 mtf의 의료적 조치는 생명연장 기술이어야 할 듯한데… 후후후. 그러니 저의 기대수명은 120년에서 의료적 조치를 하는 순간 150년으로 연장될 겁니다. 우후후후후후후.
물론 농담으로 하는 얘기지만 이 농담엔 뼈가 있다. 평균 수명이라는 언설을 밑절미 삼아 논의를 전개한다는 것 자체가 특정 여성만을 포함하겠다는 뜻이며, 트랜스여성을 비롯한 트랜스젠더는 사유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언설이 단지 트랜스젠더를 배제하기에 문제란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 ‘인구의 평균적 XX’라는 사고 방식을 비판하는 인식론에서 특정 지점에선 이 평균을 질문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문제란 뜻이다. ‘인간의 평균’으로 논의를 전개할 땐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여성의 평균’은 왜 그냥 넘어가는 것일까? 나이듦과 관련한 책을 읽으며 이런 지점이 불만이다. 그렇다고 이런 가정에서 전개하는 모든 논의가 다 불만인 건 아니고, 특정 지점이 걸린달까.
그러니까.. 생명연장 기술로서 mtf의 성전환수술을 사유의 기본틀로 가져가야 한.. 아, 이건 아닌가..;; 근데 아주 아닌 건 아닌 것 같은데..

음식/채식과 퀴어 범주의 경합

음식은 정체성을 어떻게 재구성할까? 혹은 무엇을 먹거나 먹지 않음을 선택하는 행위가 정체성을 어떻게 바꿜 수 있을까?
이를테면 이곳에도 적었듯, 내가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한 서사는 매우 간단하다. 어릴 땐 집이 가난해서 밥을 먹을 수 있는 게 다행이었고 다른 군것질 같은 건 불가능했다. 이런 배경에서 10대 시절 난 채식을 선택했고 채식이 몸에 안 좋다는 당시의 인식에서 나는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채식을 하는 건 내게 중요한 투쟁의 순간이고 채식이 얼마나 정치적 행위인지 그때부터 확인했다. 20대 시절에도 나는 여전히 채식으로 어떻게 살아갈까를 고민했고 많은 것을 채식 경험을 경유해서 이해했다. 그리하여 20대 중반 즈음 트랜스젠더로 나를 설명하기 시작했고 설명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에겐 당혹스러울 수 있겠지만 내겐 매우 ‘자연’스러운 정체화 과정. 그리하여 음식은 채식주의자라는 정체성 말고 다른 정체성/범주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요즘은 가죽퀴어(leather queer)가 비건채식을 한다면 그의 범주는 어떻게 변할까를 고민하고 있다. 가죽퀴어는 미국에서 한때 급진적이고 저항적 정치학의 주요 실천 양식 중 하나였다. 가죽퀴어의 역사 자체는 상당하지만, 이것이 1990년대 초반엔 급진적 퀴어 운동의 실천 방식 중 하나로 쓰이기도 했달까. 단지 급진적 운동의 방식으로서 가죽퀴어 뿐만 아니라 자신의 범주이자 정체성을 가죽퀴어로 삼는 사람도 많은데.. 만약 가죽퀴어를 자신의 주요 범주로 삼은 사람이 비건채식을 시작한다면 이 범주는 어떻게 변할까? (부연하면, 비건채식은 소위 식물성이라고 불리는 것만 먹을 뿐만 아니라 가죽 제품이나 동물을 이용해서 만든 제품을 입지도 않고 사용하지도 않는다고 얘기한다.) 가죽퀴어 범주와 비건채식 범주는 충돌하는 범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비건채식을 선택할 때 가죽퀴어란 범주는 어떻게 변할까? 혹은 어떻게 협상할까? 아직은 관련 논문을 찾아 읽은 건 아니고(일부러 안 찾았다) 그냥 머리 속에서 굴리며 상상/고민하고 있다. 아마도 음식이 정체성/범주를 구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만은 확실하겠지라고 가정하지만 이 가정이 옳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내겐 옳지만 다른 사람에겐 아닐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