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리카, 못 다한 이야기

+굳이 안 읽으셔도 됩니다. 기록하는 저도, 읽는 사람도 부담스러운 글이니까요. 그저 더 늦기 전에 흔적을 남기는 것 뿐입니다.
리카를 병원에 데려가던 날을 기억한다.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리카는 우어어.. 울었다. 입에선 침이 흐르고 있었다. 노트북을 켜고 병원을 찾는 동안 리카는 토하기 시작했다. 나는 리카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토하는 줄 알았다. 밖에 나오니 화장실 모래에 토한 흔적이 있었다. 화장실 근처에도 토한 흔적이 있었다. 그 아픈 상황에서 리카는 토하기 위해 화장실로 기어갔다.
그런 고양이다. 작년 중성화 수술을 하고 집에 왔을 때도, 리카는 토하기 위해 화장실로 기어갔다. 아픈 데도 화장실에서 토하려고 했다. 이 깔끔하고 착한 고양이는, 제 앞에 화장지를 놓아두면 반드시 그 위에 토했다. 가끔 방바닥에 그냥 토할 때면, 내게 미안해 하는 느낌이 역력했다. 그래서 “괜찮다”고 말하며 등을 쓰다듬어 주곤 했다. 병원에 입원시키고 혼자 돌아와 청소를 하다가 화장실 모래 위에 리카가 토한 흔적을 한참 바라보았다. 두어 시간 흘렀지만 굳지 않은 상태였다. 손으로 만지면 따뜻할 것만 같았다. 토한 액체가 천천히 식어갔듯, 리카의 몸도 천천히 식어간 것일까.
고양이는 원래 토한다는 말, 고양이는 토하는 게 일이라는 말… 만화에서 이런 내용을 읽고 너무 쉽게 믿었다. 만화 <팥경단과 찹쌀떡>에 나오는 고양이는 밥 먹고 5분 뒤에 토하기도 한다. 그래서 토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리카도 헤어볼을 토하는 줄 알았다. 돌아보면 아니었다. 리카가 토하는 건 좀 달랐다. 가끔 음식을 먹고 나서, 위에서 적당히 반죽하고 따뜻하게 데운 사료를 그대로 다 토했다. 난 그게 헤어볼을 토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건 헤어볼이 아니었다. 결국 리카는(바람도) 헤어볼을 토한 적 없다. 말 그대로 음식을 토했다. 리카는 가끔 맑은 액체, 아마도 위액을 토할 때가 있었다. 난 헤어볼이 안 나와 액체만 토한 건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때 눈치를 채야 했다. 돌아보면 Rica, the Cat 블로그에 리카가 처음으로 토했다고 걱정하며 글을 적었을 때, 그때 눈치를 채야 했다. 단지 속이 안 좋아 토한 게 아니었다. 간이 사라져가는 동안 리카가 내게 전한 신호였다. 토하는 빈도가 두세 달에 한 번에서 몇 주에 한 번으로 바뀌었을 때 눈치를 채야 했다. 고양이는 원래 토한다는 말을 믿어선 안 될 일이었다. 리카가 내게 전한 그 신호를 알아채야 했다.
진작 눈치를 챘다면… 몇 달만 일찍 병원에 데려갔다면… 다 소용 없는 말이다. 이랬다면, 저랬다면… 결국 내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야 해결될 일이다. 자학하기 위해, 나의 부주의를 탓하기 위해 하는 말, 이런 말 모두 사실 나에게 면죄부를 주는 행동이다. 내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잘못은 잘못이다. 난 그저 나의 잘못을 기록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록하는 것 뿐이다.
리카와 함께 살던 시절, 한 7~8년 뒤에 아깽일 입양하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고양이 평균 수명이 15년 정도라고 얘기한다. 리카와 바람이 연년으로 나를 떠나면 새로운 아이를 들일 자신이 없었다. 아니 둘이 연년으로 떠나는 모습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7~8년 정도 주기를 두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얼마 안 지나 나는 이런 판단을 기각했다. 리카와 바람과 같은 고양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리카처럼 순하고 착하고 똑똑한 고양이를 또 만날 수 있을까? 리카처럼 우아하면서도 애교 많은 고양이를 또 만날 수 있을까? 처음 만난 날 내 무릎에 올라와 잠시 쉬던 고양이를 또 만날 수 있을까? 출산할 장소가 마땅찮았는지 내 무릎에서 출산하려고 했던 고양이를 또 만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세상에 리카와 바람 같은 고양이를 또 만나긴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몇 년 뒤 새로운 고양이를 들이겠다는 상상을 버렸다.
리카가 떠난 지금, 그 상상을 다른 식으로 또 한 번 폐기했다. 떠난 아이를 슬퍼하는 마음은 남아 있는 아이에게서 위로 받는 것과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슬픈 건 슬픈 거고, 위로 받는 건 위로 받는 거다. 남아 있는 아이가 있다고 해서 아이를 떠나 보내는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건 아니다. … 이 사실을, 이 간단한 지식을 이제야 체득한다.
이제 외출하고 돌아오면 잠에서 깨지도 않은 얼굴로 달려와 나를 맞아주는 리카는 없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 날인 5월 24일엔 조금 일찍 집에 돌아왔다. 내가 문을 열자 세탁기 위에서 자던 리카가 잠에서 깨지도 않은 상태로 내게 오기 위해 바닥으로 뛰어 내렸다. 리카는 잠시 휘청했다. 한쪽 다리가 접히기도 했다. 잠에서 덜 깬 귀여운 얼굴로 잠시 멍하니 있던 리카의 모습. 손을 씻지 않은 상태라 나는 리카를 바로 쓰다듬을 수 없었다. 손을 씻고 나서야 리카를 쓰다듬었다. 그땐 그게 잘 한 일이었다. 지금은 손을 씻지 않았어도 리카를 꼭 껴안고 마구마구 쓰다듬을 걸 그랬다고 아쉬워한다. 명절 같은 날, 며칠 집을 비우고 집에 돌아오면 버선 발로 달려오던 리카의 모습. 난 그런 리카의 모습을 언제 즈음 잊을 수 있을까? 아니, 언제 즈음 무덤덤하게 기억할 수 있을까?
사료를 넣어둔 찬장 문 여는 소리만 나도 후다닥 달려와 냐옹, 냐옹 울던 리카도 없다. 아미캣 사료가 있는 찬장 앞에 가만히 앉아 아미캣 달라고 시위하던 리카도 없다. 곤하게 자다가도 찬장 문 여는 소리만 나면 벌떡 일어나 달려오는 리카도 없다. 리카가 떠난 후, 바람은 아미캣을 달라고 울지 않는다. 예전엔 배고프면 야옹,하고 울었다. 이젠 이런 일로 울지 않는다. 내가 더 신경 쓰는 경향도 있지만 그래서만은 아니다. 그래서 아쉽다. 찬장을 열 때마다 잠시 뒤돌아 보곤 한다. 혹시나 리카가 후다닥 달려올까 해서. 아니다. 리카가 올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냥 리카가 없는 자리를 멍하니 바라 볼 뿐이다. 리카가 입원했을 때만 해도 집이 텅 빈 것만 같더니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그저 사소한 행동에서 리카가 떠난 빈 자리를 바라볼 뿐이다.
리카가 떠난 후 현관문을 열고 집을 환기할 수 있다. 이것이 좋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다. 어떤 시간엔 리카를 아예 잊고 지내기도 한다. 이것이 리카와 살 때도 리카를 잊곤 하던 그 경험과 같은 경험인지, 아니면 리카가 떠난 사실을 받아 들이고 있는 경험인지 헷갈린다. 집에 바람이 혼자 놀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을 때처럼 그렇게 리카를 잠시 잊고 있는 건지, 이별을 받아 들이고 있는 건지 헷갈린다. 리카와 함께 살았던 시간이 아득한 옛날 같은데 아직 한 달도 안 지났다.
병원에 데려가기 전, 이동장에 리카를 넣기 전 꼭 껴안아 주지 못 한 게 내내 아쉽다. 이동장에 넣기 전 리카를 꼭 안아줄 것을… 그게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그나마 서로를 알아볼 때 꼭 안아주는 건데.. 병원에 입원했을 때 쓰다듬지만 말고 꼭 한 번 안아주는 건데.. 철장에 있는 리카를 쓰다듬지만 말고, 밖으로 빼내 꼭 껴안아 주는 건데… 고양이용 혈당 주사를 맞아 조금 정신을 차렸을 때, 그때 꼭 한 번 안아주는 건데… 그러지 못 한 게 가장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