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싶다: 문장, 내용, 부끄러움

한글로 옮긴 벨 훅스의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쉽지 않은 책이라고 느꼈다. 옮긴이는 쉬운 책이라 부담없이 번역했다고 역자후기에 썼는데 한국어로 읽는 나는 어려웠다. 아직 내가 많이 부족해서 그런가보다 했다. 하지만 나중에 영문으로 읽었을 때 단어만 안다면 영문법 초급과정도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언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쉬운 문장은 어려운 문장, 복잡한 문장으로 꼬였다. 그땐 이런 현상을 비난하기 바빴다.

돌이켜보면 참 부끄러운 일이다. 언어를 바꾸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을 몰랐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물론 어떻게든 쉽고 가독성 있는 글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기에 끊임없는 비판은 필요하지만 “번역이 엉망이다”와 같은 표현은 비판이 아니라 비난에 가깝다. 그래도 가끔은 언어를 옮기는 과정에서 쉬운 글이 어려운 글로 바뀌는 현상이 무척 신기하다. 물론 내가 옮겼다면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난수표가 되었겠지만. 그러니 그런 비난은 사실 내게로 향해야 했다. 나의 부족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타인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어젠 책방에서 김원우 소설을 훑어보는데 ‘아, 이건 시구나’라고 중얼거렸다. 내가 주로 읽는 글은 외국어를 한국어로 옮긴 책, 영어로 쓴 책이나 논문, 한국어로 쓴 논문이나 책. 영어는 일단 무시하고, 두 종류의 한국어 책 중에서 한국 학자들이나 이론가들이 쓴 한글 논문을 읽을 때면 난감할 때가 많다. 가끔은 영어보다 가독성이 떨어진다. 한국에서 학술적인 글을 쓴다는 사람 중에서 글을 잘 쓰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비문은 기본이고 간단한 문법을 틀린 글도 상당하다. 책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간단한 교정도 하지 않는 걸까 싶을 때도 많다. 번역 소설은 괜찮은 편이지만 번역투가 많아 난감하다. 그래서 이럴 때면 문장은 무시하고 건성으로 내용만 읽는 경우도 많다. 이런 상황이라, 김원우 소설을 읽으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시적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한동안 문장이 좋은 한국소설을 찾았는데, 이 작가를 만나려고 그랬나보다. 안타까운 건 현재로선 읽을 시간이 없다는 거. ㅠ_ㅠ

다른 사람의 글을 읽다보면, 중요한 건 내용인데 문장에 욕심 내는 나를 깨닫는다. 내용이 좋으면 문장이 별로라도 읽기 마련인데, 나는 내용도 별로고 문장도 별로면서, 문장에만 욕심을 낸다. 겉멋이고 사상누각이다. 그리하여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는 바보같은 상황에 처한다. 그렇다고 포기한다는 건 아니다. 그럴리가. 난 이제 글쓰기를 배우고 있고, 공부를 하고 있는 건데, 벌써 포기할 리가 있다없다. 10년을 하고도 안 된다면 그때 포기하면 된다. 그때 포기해도 충분하다. 그저 현재가 안타까울 뿐이다. 현재의 초라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인정하기 무서워 외면하는 거다. 자아비판은 자신의 현실을 외면하는 방법이다. 지독한 자기애다. 나의 자아비판은, 나의 반성은 사실 나를 다독이고 위로하는 방식이다. 자아비판과 같은 언어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비판을 피하려는 꼼수다.

나도 언젠간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