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와 훈육, 그리고 혐오: 함부로 개입하기 어려운 일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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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31. 추가
이와 관련한 논의가 계속해서 엉망이 되는 이유에는
ㄱ. 교사를 교육 전문가로 인정하는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ㄴ.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의무교육이라는 제도에 따라 초등학교 경험은 어느 정도 있다는 점에서, 모두가 이 의제와 관련해서 말할 수 있는 각자의 경험과 고민이 있다는 점이, 이와 관련한 논의를 더욱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모두가 경험이 있는데 그 경험의 층위가 천차만별이고 각자가 고민하는 방향이 있다는 점은 논의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심지어 ‘내’가 하는 어떤 이야기의 반론을 이미 ‘내’가 알고 있으며, ‘나’는 때때로 그 반론을 ‘나’의 의견처럼 말할 수 있다는 점은 더욱더 논의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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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중고를 다니던 시절, 선생에게 맞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동학대라는 용어는 있었지만 유의미한 가치를 지닌 개념은 아니었다. 그러니 부모가 자식에게 몽둥이를 휘두르는 일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고 집에서 효자손이나 파리채는 활용도 높은 도구였다. 마찬가지로 학교 선생은 부모와 같다는 노래 가사처럼, 학교 선생은 당구채나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묵직한 몽둥이를 들고 다니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어떤 선생은 당구채에 테이프를 감아 허벅지나 엉덩이에 주는 타격감을 높였다고 자랑했고, 어떤 선생은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나무봉에 쇠심을 박았다고 자랑했다. 그래서 언제 맞았냐고? 시험 점수가 떨어지면 쩔어진 점수만큼 맞았다(총 점수가 30점이 떨어지면 30대를 맞았다는 뜻이다). 떠들면 맞았고, 뭐 암튼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냥 맞았다. 뺨을 맞은 기억도 있는데(왜 이렇게 뺨 맞은 사람은 많은지…), 그 중 가장 당혹스러운 이유는 시계를 손목이 아니라 손에 착용했다는 게 꼴보기 싫어서였다.
아무려나 내가 경험한 초중고는 폭력을 가르치는 곳이었고, 애들은 패야 말을 듣는다고 믿는 체제였다. 드물고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며 교육하고자 하는 선생도 있었지만, 언제나 어려워했는데 한편으로는 패지 않는 교사를 만만하거나 편하게 여기는 학생들의 반응도 있지만, 폭력 없는 훈육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당구채로 팬 선생은 언제나 니들이 개돼지도 아니고 패야 말을 듣는 것은 상당히 잘못된 정신머리라고 훈계했다. 이 메시지는 팬 선생이 아니라 맞은 학생이 잘못한 것이라는 의미다. 때린 사람의 잘못이 아니고 가해자의 잘못이 아니다. 맞은 사람이 잘못해서 맞은 것이며, 피해자가 피해를 받아 마땅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그 시절 내가 다닌 초중고 교육의 핵심이었다. 나는 폭력이 가르치는 메시지의 핵심은 단순히 맞으면 훈육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폭력에는 다 마땅하고 타당한 이유가 있으며 맞은 사람, 피해자가 그 모든 행위의 원인 제공자라는 관념의 체화다. [기억에 의존하는 그 시절의 일화를 하나 더 말하면, 1990년대 교사에게 주는 촌지를 범죄이자 뇌물로 처벌하고자 하는 정치권의 움직임이 있었는데 많은 학교 선생이 공개적으로 반발했었다.]
지금은 내가 초중고를 다니던 시절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러니 나는 더이상 학교의 분위기가 어떤지 체감하지 못한다. 그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 중에서는 괜찮거나 존경할 수 있는 선생의 기억보다는 폭력과 강압적인 선생이 여전히 더 많았다. 혹은 성희롱이나 성폭력을 교육이라고 주장하는 범죄자도 여전히 많았으며, 언어 폭력도 여전히 빈번했다. 하지만 지금 발생하는 일련의 폭력은 학생인권운동의 성취로 폭력이라고 명명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반검열은 여전히 상당하고, 당구채로 패는 대신 상벌 제도가 도입되었고, 몸에 피멍이 드는 대신 대학 진학과 일상 생활에 영향을 주는 규율로 그 형태가 바뀌었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학교 선생의 폭력과 위협에 공포를 느낄 것인데, 특히 트랜스젠더퀴어를 비롯한 많은 퀴어는 여전히 학교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빈번하게 노출된다. 학생 사이의 폭력에 방치되기도 하고, 선생이 퀴어 혐오를 주도하기도 한다. 당구채와 같은 무기로 사람을 패는 일은 과거보다 줄었겠지만, 그보다 더 악랄한 형태의 폭력과 외면, 괴롭힘이 만연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선생으로 일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실제 어떤 지역은 전입교사의 수보다 전출교사의 수가 더 증가하고 있고, 경력 있는 선생은 근무하지 않으려고 해서 신입 교사로, 신입 교사도 기피해서 기간제 교사로 대체되고 있다고 한다. 어떤 초등학교의 반은 담임이 5번 바뀌었다고 한다(이럴 경우, 그 반의 학생들은 아무것도 못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몇 년 전 양육자가 어린이집 선생님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간섭하고, 일상 생활 태도를 간섭한다는 기사가 상당히 충격이었는데, 이제 초등학교 담임이 그 피해를 겪고 있다. 선생의 연락처를 알 수 없어야 하는 학부모가 연락처를 획득해서 연락을 하고, 메신저 프로필 사진과 문구를 간섭하고 있다. 최근에는 결혼하는 시기도 간섭하고 있다. 아마도 몇 년이 지나면 중학교 교사, 고등학교 교사의 프로필 사진을 간섭하는 일이 기사로 등장할까? 메신저의 공개는 밤이고 낮이고 주중이고 주말이고 없이 학부모가 선생에게 연락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학부모는 학생에게 녹음기를 상시 착용시켜 수업 시간에 있었던 모든 발언을 간섭하고 있다고 한다(이 말은 퀴어 관련 교육, 다양성 관련 교육이 모두 규제될 수 있다는 뜻이다). 30년의 시간 사이에 교사의 지위는 급격하게 변한 느낌이기도 하다.
하지만 교사가 온전한 가해자라거나 피해자라는 식으로 말할 수 없고, 학생이 온전하게 가해자라거나 피해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교사는 심각한 피해를 겪었고 어떤 학생은 심각한 가해를 했다. 어떤 교사는 여전히, 하지만 매우 미묘한 방식으로 폭력적 행동을 하고 있고, 어떤 학생은 학교 다니는 것이 힘들어 자퇴를 결심하고 있다. 어떤 학부모는 담임을 믿지만 어떤 학부모는 담임을 불신할 뿐만 아니라 역할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하나마나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집단을 적대 세력으로 단순화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내가 초중고를 다니던 시절의 감각으로, 선생이 잘못했겠지라고 단언하기에는 라떼의 헛소리가 될 뿐이다. 학교 분위기, 교사와 학부모, 학생 사이의 관계는 매우 많이 변했다. 교사가 피해자라고만 단언하기에는 여전히 많은 퀴어가 학교에서 강제로 추방되고 있다. 학부모의 잘못이라고만 말하기에는 모든 것이 더욱 단순해진다. 더 정확하게… 누군가를 최후의 보스몹으로 규정하면 누가 남겠는가? 예를 들어, 노키즈존이 곳곳에 있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청소년 출입을 금지하는 카페가 있다. 취준생과 카공족을 비난하는 글은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맘충이니 문제가 되는 학부모나 양육자는 30~40대에 해당하는 나이일 가능성이 높다. 얼마 전에는 노시니어존이 등장했다. 장애인은 직장인의 민폐로 규정되고, 퀴어는 아동청소년의 위협으로 규정되고… 자, 이제 누가 남는가? 오래 전에 유행한 용어, ‘혼자 있고 싶습니다, 지구에서 다 나가주세요’가 떠오른다. 모두가 문제로 규정되고 오직 나만 옳다는 식의 질문이 아닌 어떤 질문이 필요할까.
사실 나도 잘 모른다. 나는 이 글을 쓰고 싶었지만 일주일 넘게 머뭇거리고 있으며, 이 글을 쓰는 37가지 이유 중 하나는 어떤 주제에는 함부로 말을 보태지 않는 것의 중요함을 말하고 싶어서다. 그저 교사의 죽음, 기간제 교사의 죽음의 대한 무관심, 학부모의 민원, 퀴어 학생의 자퇴, 장애 등 다양한 의제와 관련한 전문가의 의견을 청취하면서, 나는 한 가지 질문만 보태고 싶었다. 훈육과 학대의 경계를 둘러싼 논쟁이 더 치열하고 복잡해져야 한다고. 이번 사건을 고민하다 떠오른 시간은 1990년대 성폭력방지특별법과 성희롱방지특별법이 생겼을 때였다. 그 시절 한국 사회는, 많은 직장에서는 팔을 만지면 4만원, 어깨 만지면 5만원 따위의 끔찍한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성희롱, 성폭력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의 조롱과 비난이었다. 많은 페미니스트가 기억하겠지만, 이런 식의 반응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무엇이 성폭력인지를 둘러싼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 학대와 훈육 사이의 논쟁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고민했다. 예를 들어,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는 아이를 깨우는 행위는 학대인가 훈육인가? 수업 시간에 떠들어서 10분 정도 교실 뒤에 세워두는 행위는 훈육인가 학대인가? 시사프로그램, 방송에서 인터뷰를 하는 많은 교사가 전하는 현재 상황에서, 이런 훈육 행위가 학대로 고발되고 민원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나 주변의 많은 이들은 이것이 학대인지, 그리고 민원으로 가서 교사를 2년 넘게 괴롭힐 사항인지에 질문을 하고 있다. 나 역시 이것이 민원을 넣고, 소송을 걸고, 2년이 지나도 계속해서 교사를 괴롭히는 사안이 되는지에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질문은, 학대와 훈육 사이의 한계 논쟁이다. 나와 비슷한 세대가 겪은 일은 거의 명백한 학대, 아니 폭력 그 자체였지만 그 시절 그 폭력은 훈육이었다. 지금은 많은 사람이(모두가 아니라는 것이 함정) 그 시절의 행태를 훈육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지금 문제가 되는 행동, 민원의 대상이 되는 행동은 훨씬 미묘하고 복잡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수업 시간에 핸드폰을 하고 있어서 교실 뒤에 세워두는 행위는 훈육인가? 숙제를 하지 않아서 경고를 하는 행위는 훈육인가? 퀴어여서 이를 문제 삼으며 이성애를 강제하는 행위는 훈육인가?  어떤 질문은 정치적 쟁점이고, 어떤 질문은 인권의 의제여서 첨예한 논쟁의 장에 위치하는 쟁점이고, 어떤 질문은 사회적 상식이라고 불리는 일이라 당연히 훈육해야 한다고 여기는 일이지만, 사실 그 경계는 미묘한 차원이 있다. 나도 내가 지금 논의의 층위를 섞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정확하게 이렇게 섞이는 지점을 고민할 필요가 생겼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명하다고 느낀다면, 사실 그 지점에서 문제가 응축되어 있다는 의미이며, 자명하다고 느끼는 순간 비난하기와 전선 만들기가 쉬워진다. 그래서 일부러 섞으며 훈육과 학대의 경계를 질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물론 이런 고민은 내가 학교에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질문/행태일 수도 있다. 당장 내일 또 다시 학교로 출근하거나 등교해야 하는 누군가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전문가의 의견을 청취하면서(나는 내가 잘 모르는데 답답해서 알고 싶으면 다양한 전문가의 의견을 50시간 이상 찾아 듣는 편이다) 그 의견에 학대와 훈육을 자명하게 구분하는 경향에 질문이 필요하다고 고민했다. 지금 억울한 많은 교사가 사실은 학대를 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양육자를 비난하는 것으로 더 나은 상황으로 전개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며칠 내에 삭제할 수도 있다.) (50H50 칼럼🐰)

기계적 중립을 다시 해석하기 위한 메모

손석희가 MBC 라디오 시선집중을 진행하던 시절, 손석희는 영향력이 가장 큰 언론인이었으며, 언론인 중 인지도가 가장 높은 인물이기도 했다. 이 인지도는 부정적이기보다 긍정적인 형태였다. 단적으로 많은 시위나 투쟁 현장 혹은 사고 현장에서 다른 언론은 불신으로 쫓겨날 대에도, 시선집중에서 왔다고 하면 인터뷰가 가능했었다. 이것은 언론인 신뢰성 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손석희는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로 1위였다. 그런 손석희가 들었던 중요한 비판 중 하나는 기계적 중립이었다. 이것은 손석희가 고민하는 중요한 가치이기도 했고, 공중파 방송 혹은 공영방송의 역할 및 가치와 관련한 고민이기도 했다. 물론 나는 미디어를 연구하지 않았고, 그래서 공영방송의 역할과 관련해서는 말을 잇기가 어렵다. 하지만 기계적 중립은 중요한 의제다.
페미니즘 정치, 퀴어 정치를 배우는 이들은 알겠지만 이 정치학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정파성이다. 지식과 논의는 역사상 단 한 번도 가치 중립적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비판 이론을 하는 이들은 가치 지향을 중시했고, 투명하고 보편적 지식보다 맥락적 지식, 상황적 지식을 탐색하며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어떤 가치를 담을 것인가를 중시했다. 지난 칼럼에서 경험의 정치성을 다룬 이유도, 바로 가치 지향, 논의의 맥락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찬반 양론에 근거한 기계적 중립은 무책임하거나 논란을 피하고자 하는 태도로 읽혔고 때때로 권력에 공모하는 태도로 읽혔다. 많은 의제는 찬반 양론으로 구성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예를 들어 인권 의제는 찬반 양론보다 가치 지향이 중요하다. 퀴어문화축제를 다루며 찬반 양론으로 배치한다면 혐오 발화를 공중파 방송에서 송출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통해 혐오를 정당화하는 효과를 야기한다. 그럼에도 많은 공중파 방송은 퀴어를 비롯한 인권 의제를 찬반 양론으로 배치하곤 했다. (요즘은 이런 경향이 덜해서 퀴어 의제에 가치 지향을 담으며 퀴어 혐오를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는 편이기는 하다.)
그런데 기계적 중립은 논란을 피하거나 권력에 공모하는 방식인가라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이는 시선집중의 역사가 말해주기도 하는데, 시선집중의 역사 그 자체였던 고정 패널 김종배는 10년도 더 전에 쓴 기사를 빌미로 좌파라며 방송에 쫓아냈다. 시선집중의 상징 그 자체였던 손석희 역시 계속해서 공격받았고 결국 라디오 진행을 그만두어야 했다. 이것은 기계적 중립이 한편으로는 혐오 발화를 정당한 의견으로 승인하는 문제를 가질 수 있지만, 동시에 권력의 행태를 비판하는 의견 역시 정당한 의견으로 채택한다는 뜻이었다. 기계적 중립은 어떤 상황에서는 듣기 괴로운 일이었지만, 다른 어떤 상황에서는 너무도 소중한 태도였고 기계적 중립, 반론권 제공은 자리 즉 생계와 생활을 걸어야 하는 저항 행위이기도 했다.
지금 기계적 중립과 관련해서 글을 쓰는 이유는 요즘 방송과 관련한 다양한 뉴스 때문이다. 정부 혹은 대통령실은 공중파 방송을 규제하고 통제하기 위해 수신료 분리 징수 등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고, 방송의 공공성을 파괴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시는 TBS의 진행자가 싫어 그 진행자가 관둔 뒤에도 방송국 자체를 폐업에 준하는 상태로 내몰고 있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현재 상태에서 변화가 없다면 내년에는 폐업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여당은 방송 패널의 정당 편향을 평가하며 방송을 공격하고 있다. 이것은 2010년 전후, 즉 이명박 정권 당시의 행태와 비슷하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를 지나칠 정도로 단순하게 정리하면, 유튜브가 있다. 유튜브에는 온갖 정보가 넘치고 온갖 영상이 넘치고 있다. 그 중에는 정파성이기보다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방식의 영상이 넘쳐난다. 이것은 유튜브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유튜브에 공개된 영상은 모두 등가의 가치로 수용된다는 데 있다. 개인이 가짜뉴스를 전파하는 영상, 개인의 귀여운 고양이 영상, 공중파 방송의 클립, 공영방송의 탐사보도는 모두 동일한 가치와 층위로 유통된다. 이명박 때도 대안언론은 있었지만 그 언론은 블로그의 형태를 취하거나 팟캐스트 형태를 취했다. 이 형식의 차이는 공영방송과 대안언론의 성격을 완전히 구분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유튜브에서 모든 영상은 구분되지 않는다. 이 상황은 공영방송의 가치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시대의 흐름이며, 한국 사회가 언론에 갖는 불신(나 역시 이 불신에 일정 부분 공모하고 있다)이 촉매한 변화이기도 하다.
나의 고민, 기계적 중립과 관련한 고민은 현재의 변화가 다양한 의견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측면도 있지만, 특정 정당을 향한 강한 지지를 표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특정 정당은 무조건 옳고 상대편은 적이라는 식의 태도가 기본값으로 바뀌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런 변화는 비판을 어렵게 만들고, 비판적 지지를 변절이나 적대로 만든다. 정확하게 이런 상황적 분위기에서 나는 기계적 중립이 그럼에도 유의미한 태도가 아니었나라는 “라때” 같은 고민을 한다. 이것은 이 칼럼의 시작과도 같은 SNS 시대에 라디오 듣기와도 같은 감각이자 고민이기도 하다. 나와 완전히 동일한 의견만 듣는 일은 나의 고민을 깊게 만들기 보다 얕게 만들고 나의 정치적 입장을 가치 지향으로 만들기 보다 편가르기로 만든다. 예를 들어 퀴어 정치는 완전히 동일한 성격을 갖는가, 프라이드의 의미는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가, 비판 이론은 권력을 어떻게 갱신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나의 편이라고 불리는 집단, 내가 가장 신뢰하는 집단 내에서도 논쟁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논쟁이다. 완전한 동일성, 하나의 옮음만을 따르는 태도는 논의도 논쟁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며, 반대는 아니어도 다른 의견이 나올 때에만 비로소 갱신할 수 있는 정치학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정확하게 여기에서 기계적 중립의 의미를 고민한다.
이런 고민을 할 때마다, 몇 가지 고민은 있다. 나는 SNS에 할 이야기의 팔 할은 친구와 수다로 끝내야 한다고 믿는데, 나 역시 일상의 대화에서 괜찮은 이야기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며칠 전 소중한 친구와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SNS를 했다면 인생 퇴갤을 수십 번은 했을 거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SNS가 나쁘다는 주장이 아니라, 나 역시 편파적이고 편협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자주 뻘소리를 하고, 잘못된 이야기를 하여, 한두 시간 뒤에 등골이 서늘한 느낌으로 후회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나의 이런 감각은 종종 철지난 꼰대 같음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더 정확하게는 공중파나 기계적 중립과 같은 감각은 모두 그 시절의 산물이며, 특정 시절의 산물에 근거한 논의나 고민은 새로운 변화나 감각의 변화를 잘못된 것, 틀린 것으로 이해할 위험을 내포한다.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여러 가치 중 어떤 것에 근거하여 내가 잘못되었음에도 ‘그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믿는 것은 아닐까? 이런 두려움은 글을 쓸 때마다 문장을 이어나가기 어렵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래서 글을 계속 써야겠다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글로 써봐야 내가 어떤 잘못된 생각을 하는지 거를 수가 있으니).
아무려나, 그럼에도, 혹은, 어쨌거나… 무수히 많은 접속사를 남발하면서도 결국 나는 기계적 중립이라는 용어를 요즘들어 더욱 자주 떠올린다. 이 말이 지금 다시 어떤 재해석 과정을 통해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며. 물론 다시 널리 쓰인다면 나는 가장 빨리 이 용어를 비판하겠지만 그럼에도… (50H50 칼럼)
+가장 혼란스러운데 그럼에도 메모니까…

경험의 위험성에 대하여: 수능 논란이 만드는 규범성

한국의 정치적 감각에서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은 상당히 무서운 말 중 하나다. 비록 이 말에 조롱의 의미를 담아서 사용할 때가 더 많다고 해도, 그 말에는 위험과 두려움을 내재한다. 그 이유는 실제 능력이 없거나 잘못된 판단을 할 때에도, 대통령이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통해 필요한 모든 토론과 논의, 복잡한 쟁점에 대한 더 많은 연구의 필요성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경험 본질론은 한국의 오래된 속담 ‘백문이 불여일견’처럼 시각에 기반해서 경험하면 곧 알 수 있다는 심각한 오만과 오해를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경험은 곧 알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해석과 재해석이라는 정치적 투쟁의 장이 된다.
이것은 페미니스트 이론가이자 역사학자들이 오랜 세월 논쟁했던 주제이기도 하다. 경험하면 곧 알 수 있다는 말은 중요한 쟁점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첫째, 가부장제 사회에서 특권적 권력을 누리는 이들에게 억압받는 이들의 폭력 피해와 같은 일은 인지 불가능한 사건으로 취급되었다. 그렇기에 가부장제의 폭력적 작동 양상은 경험한 적 없는 일, 그리하여 이 세상에 존재한 적 없는 사건으로 취급되었고, 이는 억압과 피해를 계속해서 투쟁하며 입증해야 하는 사건으로 만들었다. 이럴 때, 경험은 자연스러운 것, 자명하게 모두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어떤 위치,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지가 경험 인지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 다시 확인된다.
둘째, 경험한 피해나 억압이 그 자체로 자명하게 알 수 있는 사건인가를 질문한다면 그 대답은, 그렇지 않다. 많은 페미니스트가 여성학 강의나 강좌를 처음 듣고 나면, 그동안 자신이 겪은 그 많은 사건이 성폭력이나 성차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한다. 퀴어와 관련한 인터뷰 문헌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에서는 억압과 피해가 당연한 것으로 인지했다가, 유학이나 어학연수 등을 이유로 외국 생활을 하면서 억압과 피해가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다시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는 서사를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억압과 피해의 경험 역시 자명하기보다 해석과 지식의 영역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페미니즘 정치가 경험을 자명한 것으로, 경험했으면 알 수 있는 것으로 논했던 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더 많은 경우 페미니즘은 경험을 자명한 사건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 기존의 경험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정치적 장을 마련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언어를 모색하는 작업을 한다. 이것은 경험 자체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경험의 의미, 경험을 인지하는 방식을 본질화하지 않는 것이며 경험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며 새로운 언어를 모색할 수 있는 장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셋째, 경험이 본질화되면 유사한 범주의 속한 사람은 같은 사건에 대해 동일한 해석을 한다고 가정된다. 이것은 성희롱 피해와 같은 폭력의 피해에 모든 여성은 동일한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는 뜻이며, 한 공동체에 대한 감각은 구성원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느낄 것이며, 모든 퀴어는 동일한 정체성이면 그 경험과 생애사도 동일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미 익숙하겠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비규범적 질서를 규제하고 통제, 관리하기 위한 지배 규범적 상상력이다. 폭력이나 차별에 대한 감각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그 차별과 폭력을 덜 심각한 것으로 수용한다고 해서, 폭력이나 차별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사실 이 논의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경험이 본질화되면 이성애규범성을 뒤트는 퀴어의 등장은 불가능하고 가부장제 질서를 문제 삼는 페미니스트의 등장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경험 본질론에서 이들의 등장은 그 자체로 우발적인 오류다. 교육 제도에서, 가족 제도에서 누구도 퀴어한 실천을 가르치지 않는데 어떻게 퀴어로 고민하고, 페미니스트로 고민할 수 있겠는가? 반-퀴어 혐오 세력이 퀴어를 오류로 주장하는 이유도 인간의 경험을 동질화, 본질화하는 경향과 연관된다. 경험은 본질적이기보다 엄청나게 많은 편차와 우발성이 중첩되고 여기서 해석과 새로운 인식론이 다시 겹쳐지면서 변주와 변형이 발생하며 그렇기에 언제나 해석과 재해석의 장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연구 방법 중 인터뷰 연구를 진행하는 이유도 일정 부분 이 고민에 위치한다. 경험에 대한 해석은 동일하지 않고 그렇기에 세상을 이해할 새로운 언어는 갱신되어야 하기 때문에 매번 새로운 인터뷰 질문이 필요한 것이다.
경험에 대한 이런 (매우 축약된) 논의는 경험을 말할 때 언제나 가장 첨예한 논쟁의 장에 참여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더 정확하게, 당사자주의를 알게 모르게 지지하는 발언이나 행동은 언제나 경험을 본질화하는 위험을 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두가 유사한 경험을 할 것이라는 가정은 내부 구성원을 동질화하고, 동질화나는 내적 다양성을 논의할 수 없게 만들고, 이것은 규범성을 생산하는 위험한 촉매가 된다. 그렇기에 한 공간에, 친밀한 공동체에 있는 이들이 경험을 공유할 것이라는 믿음은, 때때로 안전함과 편안함을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도, 가장 폭력적인 장이 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누군가가 자신은 그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질문을 하는 순간이 매우 고맙고, 또 반성한다. 그 질문은 나 역시 익숙한 그리하여 동질적인 폭력적 공간을 만들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대화 요청이기 때문이다.
경험과 관련한 여기까지의 논의는 사실 여기저기서 여러 번 쓴 적이 있는 기분이고, 변주되지만 대체로 유사한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경험과 관련한 논의를 반복하는 이유는, 경험을 본질화하며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너무도 많은 곳에서, 너무도 빈번하게 마주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 글을 수능과 관련한 최근 논의와 연결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고민이 많았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이와 관련해서 발언을 하는데, 나까지 여기에 말을 보태야 할 것인가. 그럼에도 이 주제에 말을 보태기로 한 이유는 경험과 관련한 질문 없음이 모든 논의를 망치고, 단순히 논의를 망치는 문제를 넘어 그 논의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이들을 가장 빨리 배제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회에서 모든 성인은 아동 청소년 시기를 겪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그 시기를 겪었기에 그 시기와 관련해서 성인이라면 누구라도 발언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에 교육 문제가 겹치고, 수능이나 대학 입시와 관련한 주제가 겹치는 그 논쟁은 더욱 뜨겁고 복잡하고 지저분해진다. 많은 성인이 대학 입시 공부를 했고, 방송에 출연하는 상당수의 패널이 대학에 입학했거나, 졸업한 이들이기에 입시와 관련해서는 더욱더 가볍게 말을 얻는다. 하지만 그래서 또 안다. 요즘의 십대는 어떤 모습인지 성인은 잘 모른다는 사실을. 그래서 또 안다. 그래도 십대 시절을 경험했으니 그 시절과 관련해서 말을 보탤 수 있다. 요즘 십대가 어떤 지는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십대 시절을 겪었으니 그 시기와 관련해서 말을 보탤 수 있다는 믿음. 마찬가지로 요즘 입시 제도가 어떤지는 전혀 모르지만, 그래도 교육 과정을 거쳐서 입시를 경험했기에 입시와 관련해서는 말을 보탤 수 있다는 믿음. 이 모든 믿음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 수준은 아니라고 해도 겪었으니 알 수 있다는 오만함 혹은 위험성을 내재한다.
 
오만함 혹은 위험성은 단순히 경험했으니 알고, 경험했으니 그 주제에 대해 떠들 수 있다는 믿음에 제한되지 않는다. 이런 식의 논의 전개는 아동 청소년의 삶을 입시와 연결짓고, 이 연결은 입시를 준비하고 정규 학교 과정에 참여하는 청소년을 보편으로 삼는다. 더 정확하게, 이 논의에서 학교밖 청소년이나 대학 진학을 고려하지 않는 청소년은 아예 청소년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으며, 이와 관련한 논의 자체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 한국 사회에서 입시 중심의 학교 제도가 청소년의 삶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킬러문항으로 촉발된 모든 논쟁은 단순히 수능의 문제가 어려우냐, 쉬우냐의 문제, 모든 학생을 등급제로 나눠서 위계를 만드는 문제 뿐만 아니라 누가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느냐의 문제, 모든 청소년은 학교에서 입시를 준비하는 존재인가라는 문제를 반드시 같이 질문토록 한다. 이것이 누락되는 현재의 많은 논의나 발언은 한편으로 의제에 집중하는 발언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누락과 배제를 아예 사유하지 않는 문제의식이 된다.
이런 질문을 경험 논의와 연결지으면,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단순히 반지성주의나 오만함에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 경험 자체가 배제와 추방, 누락의 실천 속에서 구축되는 상상력일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경험은 내 삶의 일부일 수 있지만 그것이 정치적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논쟁되지 않으면, 배제의 본질주의, 추방의 규범 생성을 전제한다. 이것의 가장 익숙한 판본은 트랜스젠더퀴어를 배제하며 여성을 생물학적 본질주의로 만들고자 했던 일군의 주장이다. 그러니 경험은 어려운 문제라는 점을, 경험을 말할 때 그 경험이 전제하는 규범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진부하지만, 익숙하지만, 꼭 기억할 필요가 있는 쟁점이라고 믿는다. (50H50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