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의 사회적 교훈

오늘자 건조 에디터의 말… MZ세대에게 책임감이 없다, 권리는 찾으면서 의무는 어쩌고 저쩌고 많이 말하는데, MZ세대는 세월호 참사에서 이태원 참사를 동년배/동세대로 겪었고 이를 통해 어른들의 무책임함을 벼락 같이 배운 세대라고…

이 말을 듣는 순간, 너무 충격적이었다. 제대로 고민하지 않는 내가 부끄럽다.

휴식

주말 내내 집에서 졸고 졸고 졸고 졸고 졸며 지내고 있다.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너무 졸려서 낮잠도 자고 늦잠도 자고 그러고 있다. 그래서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깨달았는데… 지난 주말에 단체 행사로 12시 넘어서 끝났고 대휴 사용 없이 계속 출근했고 그랬구나. 잊고 있었는데 이번주는 피곤할 수밖에 없구나.

주말 집에서 졸기만 하다가 요즘 책을 너무 안 읽나 싶어 살짝 반성을 했다. 반성도 습관이지만, 수업을 위한 논문 읽기 말고 그냥 읽은 책이 거의 없구나. 그와중에 한겨레에 신청했더니 당첨된 건지 사연에 그냥 보내준 건지 모르겠지만, [기억의 공간에서 너를 그린다]를 받았다. 매우 감사했고 당분간 바쁜 일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어야지. 앞에 메모를 적어주셨는데, 공통 문구겠지만 그럼에도 감사하기도 하고, 재난과 안전은 언제나 화두니까…

지난 수업에서 얼버무리며 한 이야기가 있는데, 언젠가 한 선생님이 내게 퀴어와 트랜스젠더퀴어의 고통과 관련한 이야기가 중심이고 즐거움, 쾌락 등을 다루지 않는다며 그와 관련한 논의도 같이 해보라고 제안했었다. 퀴어를 고통과 피해로만 재현하는 것에 비판적이니 그 말을 새기려 했지만… 실패했다. ㅋㅋㅋ 한때는 모든 청탁 원고의 내용이 퀴어의 죽음이었다… 그나마 이번에 논문 하나 준비 중인데 이 논문은 희망 혹은 유토피아를 모색할 수 있으려나. 성과 폭력은 너무도 짝패마냥 붙어 있어서 폭력과 우려와 염려와 차별을 뺀 퀴어 논의를 모색하는 작업도 필요할텐데(없다는 게 아니라) 내가 그것을 할 수 있으려나…;;;

암튼 좀 쉬고 작업해야지.

폭력을 규정하는 규범성

폭력은 무엇인가에서 폭력은 무엇을 하는가로 질문을 바꾸는 것은 익숙한 방식이다. 감정은 무엇을 하는가처럼 정의를 모색하기보다 그것의 효과를 탐색하는 작업은 사유의 방향을 새롭게 하기 때문이다.

폭력은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때, 폭력은 지배 규범을 재생산하고 안정성을 재강화한다는 답은 어렵지 않다. 폭력의 행사는 지배 규범적 권력을 실천하는 행위일 때가 많고, 그리하여 폭력 가해자가 상정하는 규범성에 피해자를 복속시키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질문의 방향을 바꿔보면, 특정 행위를 폭력으로 규정하는 일은 또한 무엇을 생산하는가로 다시 질문할 수 있다. 어떤 행위를 두고 폭력적이라고 규정하는 행위 자체가 규범을 재생산하는 작업이라는 의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BDSM은 폭력인가? 드랙퀸 실천은 여성 혐오인가? 성전환 수술은 신체 훼손이자 여성성을 혐오하는 것인가? 퀴어-페미니즘 운동사/이론사에서 이런 질문은 종종 급진적 저항 정치와 비판 이론을 구축하는 중요한 내용이었다. 지금도 드랙은 여성 혐오라는 비판이 상당하고, 트랜스젠더퀴어를 향한 혐오가 페미니즘의 의제로 채택된다. 그렇다면 특정 행위를 폭력으로 규정하는 행위가 폭력적 규범성을 파훼하는 행동이 아니라 폭력적 규범성을 재생산하는 실천으로 다시 독해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럴 때 폭력은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은 완전히 다른 상황을 동시에 포착한다. 특정 행위를 폭력으로 규정하고 그 폭력 행위가 생산하는 규범성을 문제삼는 것. 특정 행위를 폭력으로 규정하는 인식론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비트랜스)여성성 같은 특정 규범을 본질화하는 것. 물론 전자와 후자는 다른 논의의 맥락에 위치하고 다른 질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중첩성을 다시 탐색할 수는 있다.

물론 이것은 아직은 아이디어 메모 수준이지만 올해 중으로 글 한 편을 쓰고 싶은 주제이기는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