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오글거리는 오만함

블로그 리퍼러 로그를 살피다보면 갑자기 특정 주소로 내 블로그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그 주소를 클릭하면/터치하면 출처로 찾아갈 수 있지만 많은 경우엔 그냥 내 글이 나오거나 로그인을 요구한다. 즉 나는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내 글이 유통되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어디선가 유통되고 있는데, 내 블로그 글이 유통되고 있음을 의도치 않게 확인하게 된다. 나는 늘 이게 조금 불만인데 내 글(!)이 유통되는 걸 확인한다는 점 때문이다. 리퍼러로그를 확인하지 않으면 해결될 문제지만 리퍼러로그 확인하는 쏠찮은 재미를 버릴 순 없지.
쪼렙 블로거이자 쪼렙 학생이 말하기엔 매우 오만한 발언이지만 나는 내 글이 유통되고 회자되길 바라지 않는다. 내가 고민하는 인식론이 공유되길 원한다. 나는 내 이름이 기억되길 원하지 않고, 내 글이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기보다는 그 글에서 이야기하는 인식론이 기억되길 바란다. 물론 이것은 정말로 위험하고 오만한 바람이다. 가장 큰 문제는 내 글에 인식론 따위가 있느냐부터니까. ;ㅅ; 이것이 자칫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싶다는 오만으로 읽힐 수 있는데(누군가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매우 놀랐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인사에 불과하겠지만, 매우 가끔 ‘글 잘 읽고 있다’거나 ‘글 정말 좋아한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기억을 아무리 훑어도 두어 번에 불과하지만… 뭐, 당연한 일이고 다행인 일이다.) 그런데 나중에 그 사람이 하는 논의를 보면 내가 가장 비판하는 입장이거나 내 인식론을 정확하게 배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깨닫기를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 글이 회자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없다. 그것은 이른바 유명세나 인지도가 아니라 그냥 그것일 뿐이다. 그래서 내가 글을 쓰며 소박하게나마(생각해보면 매우 오만하게) 바라기를 글 자체가 아니라 인식론을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의 능력을 생각하면 허무맹랑하다. 크크크. 그리고 어차피 나는 그냥 언제나 그렇듯, 이런 바람 따위 무시하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겠지. 리퍼러로그 보면서 별 이상한 고민을 하는구나.
+
이 글을 한 달 뒤에 보면 진짜 부끄럽겠지. ㅠㅠㅠ
이렇게 흑역사는 쌓여갑니다.

4 thoughts on “어쩐지 오글거리는 오만함

  1. 루인님- 벌써 가을이네요, 오랜만이에요. 저는 그나마 디스포리아와 젠더이슈에서 조금은 거리를 두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지금은) 생겼습니다. 루인님이 여러가지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내가 hrt를 하며 겪은 성격의 변화가 호르몬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그것을 남성적/여성적이라 할수 있는가’ 라는 어떤 분의 말씀을 듣고 생각난건데 에스트로젠 수치가 높으면 여자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들어서요. 어떤 호르몬의 레벨이 높든 그것과 젠더를 꼭 엮어서 생각해야 하는걸까요?

    ps. 파스타 드신거 보고 저도 오늘 로티니 파스타를 먹었어요ㅋㅋ

    1. 어쩐지 답정너 같은 말씀을 하셔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어떻게 답변을 드리는 것이 좋을까 하고요. 흐흐흐

      최근 건강 및 질병, 병리화 관련한 자료를 이것저것 보다가 류마티즘 자료도 조금 봤는데요. 류마티즘의 원인은 크게 네 가지를 추정하는데 하나는 유전요인, 환경요인, 감염, 그리고 여성호르몬이라고 하더라고요. 에스트로겐을 지칭하는 것 같은 여성호르몬이 류마티즘의 원인 중 하나로 추정하는 이유는 여성에게서 압도적으로 많이 발생해서(대략 전체 류마티즘 환자 중 80~85% 정도?)라고 해요. 정확하게 인과관계가 연구된 것도, 확정된 것도 아니고 그냥 여성에게 많이 생기니까 여성호르몬 때문이겠구나라는 추정인 거죠. 전혀 과학적이지도 않고, 인과관계도 없지만 막연한 추정, 사회적 통념이 하나의 원인 요인을 공공연히 말할 수 있도록 하고요.

      특정 호르몬 수치와 젠더를 엮어야 하느냐면 아니요. 이른바 과학적 엄밀성으로 접근하면 전혀 안 엮일 거예요. 비트랜스남성 중에도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현저하게 낮은 사람이 있고, 비트랜스여성 중에도 테스토르테론 수치가 현저하게 높은 사람이 있으니까요. 그것이 반드시 여성답다, 남성답다를 결정하지도 않는다고 고민해요. 어떤 형태로건 영향을 줄 수는 있겠지만요(다른 말로 영향을 안 줄 수도 있고요). 호르몬 수치 변화가 성격이나 다른 어떤 특징에 영향을 분명 끼치겠지만, 호르몬 수준과 젠더를 필연적 관계로 엮는 건 류마티즘의 원인 중 하나로 여성호르몬을 꼽는 것과 비근하다고 고민해요. 무엇보다 이런 연결은 젠더퀴어를 설명할 수 없잖아요. 🙂

      +
      오, 파스타 맛나게 드렸으려나요? 흐흐

    2. 저는 의료적 트랜지션을 하지않았기 때문에 의료적조치를 취하신분이 “내가 ~~해봤는데 ~~이렇더라” 이렇게 말씀하시면 왠지 그 말에 반박할 자격이 없는것 같아서 말하기가 망설여져요. “넌 안해봤는데 니가 어떻게 알아?” 이런 반응이 나올것 같아서요.

      그래서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셨을때 그게 아닌것같다고 말을 못하고 루인님한테 와서 ‘내 생각이 맞나요?’ 이러고 있는거죠 (음 좀 한심한거 같네요..)

      렌틸콩으로만 로티니 만들었다고 해서 사봤는데 맛있었어요 🙂

    3. 답정너란 표현이 이상했다 싶어요. 죄송해요.
      이런 표현을 사용한 건, 질문에서 이미 어느 정도 방향을 잡고 계신다고 느꼈거든요. 그래서 그만… ^^;

      말씀하신 것처럼 호르몬을 한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하면 하지 않은 사람이 뭐라고 하기 참 그럴 때가 있어요. 호르몬을 한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니고, 호르몬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효과를 야기하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죠. 무엇보다 해본 사람에 비해 안 해본 사람이 모르는 것이 분명 존재하지만, 해본다고 다 알 수 있는 건 결코 아닌데 해봐서 안다고 말하는 사람을 볼 때면 정말 답답해요(무슨 이명박도 아니고… -_-)

      아무려나 언제든 댓글 주셔요. 늘 좋은 질문 주시잖아요! 좋은 질문을 한다는 건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고요. 🙂

      렌틸콩으로 만든 로티니라니요! 맛났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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