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리카, 5월 27일의 기록

01
그래서 내게 온 것이냐, 이 녀석아…
02
아침,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갈 때 바람은 당황했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혼자란 사실에. 내가 처음 문을 열고 나갔을 땐 방에 머물렀다. 밖에서 잠깐 기다렸다. 바람이 야옹, 울었다. 문을 여니 당혹스러운 표정의 바람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뒤로 하고 나섰다.
기분은 괜찮았다. 26일 밤, 고양이용 혈당(?)주사 덕분에 리카가 살아났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을 정도의 기력이 났기 때문이다. 식염수와 혈당(?)을 섞은 수액을 놓고 있으니 조금씩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다. 꼬리를 시원스레 흔드는 모습을 믿었다.
오후에 특강이 있었다. 몸은 무거웠지만 티낼 수 없었다. 사실 마지막에 티가 났다. 10분 정도 일찍 끝내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일찍 리카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질문을 하려는 학생이 있었다. 총 두 명의 질문과 10분 더 걸린 답변. 끝나고 짐을 정리하는데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 열심히 답변을 하고 싶었는데, 말이 잘 안 들렸다. 내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내가 깨달을 정도였다. 어렵지 않은 질문인데 학생은 자신이 말을 잘 못 해서 그렇다고 변명을 하며 열심히 질문을 했다. 나는 또 열심히 들으려고 애썼다. 쉽지 않았다. 열심히 답하려고 애썼다. 쉽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리카의 일과 강의는 모두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구분하고 싶었다. 구분이 안 되어 부끄러웠다.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구분이 안 되어 부끄러웠다.
03
바로 리카에게 갈까 하다 집에 들렸다. 바람을 챙겼다. 리카에게 온 신경을 쏟다가 바람이 섭섭하면 안 되니까. 자리에 앉아 잠시 쉬면서 바람과 놀았다. 그러며 고민했다. 리카가 좋아하는 아미캣을 챙길까 말까로. 혹시나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면 아미캣을 주고 싶었다. 리카가 먹지 않아도 길고양이에게도 줄 수 있으니까. 결국 챙기지 않았다. 지금은 아미캣이 아니라 끈적한 영양제를 먹을 시기니까.
전날보단 발걸음이 가벼웠다. 병원에 갔고 의사가 나왔다. 표정이 어두웠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걱정하는 말투. 잠시 기다렸다가 리카에게 같이 갔다. 내가 앉을 수 있도록 준비해둔 의자가 먼저 보였다. 의자에 앉기도 전에 리카가 보였다. 리카는 옆으로 누워 있었다. 이불을 덮고 수액을 맞으며 누워있었다. 코엔 튜브가 달려 있었다. 입으로 음식을 계속 안 먹을 경우 취하기로 한 조치였다. 상태가 더 안 좋았다. 구토하는 것도 힘들다는 듯 입 주변엔 굳은 침으로 털이 뭉쳐있었다. 코 끝으로 간신히 숨만 쉬고 있었다. 의사는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며 보호자의 의지에 달렸다고 말했다. 일단은 하루 더 지켜보자고 답했다. 토요일에 혈액검사를 하기로 했으니 그때까지 지켜보자고 말했다.
잠시 내려가서 다른 고객을 보고 온 의사가 말했다. 코에 튜브를 끼우면서 제대로 끼웠는지 확인하려고 엑스레이를 찍었다고. 그러며 확인했는데, 간이 매우 작았다며(거의 없다고 했던가) 이건 급성이 아니라고 했다. 오랜 시간 진행된 일이라고 했다. 나는 몇 주 정도를 떠올렸다. 그러다 몇 달 정도 걸린 것일까요,라고 물었다. 의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고민을 하더니 1년 정도, 1년 이상 진행된 상태라고 했다. 혈액검사를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난 중성화수술할 때 기본적 혈액검사를 했다고 말했다. 날짜를 가늠하니 그것이 일 년이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럼 그 전부터 진행되었던 걸까?
04
리카 곁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서 내게 온 것이냐?”라고 말했다. 넌 처음부터 네 간이 안 좋은 것을 알고 내게 온 것이냐. 그런데 왜 좀 더 좋은 집에 가지 않고 고작 내게 온 것이냐. 고작 1년 정도 더 살려고 내게 온 것이냐. 그럼 더 좋은 집으로 가지 왜 나를 선택한 것이냐. 작년 그 추운 겨울을 무사히 살아 남아 여덟 아가도 무사히 출산하고 양육했으니 이제 좋은 일만 있어야 하는데, 왜.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그래서 내게 온 것이냐고, 그래서 내게 온 것이냐고… 계속 중얼거렸다. 한쪽 코로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든 수액을 받아 들이는 모습을 보며 더 잘해주지 못 해서 미안하다고 웅얼거렸다. 한때 사이가 너무 안 좋았던 일이 떠올라, 속좁은 집사라서 미안하다고 입안에서 웅얼거렸다. 좀 더 빨리 병원에 데려왔어야 했는데 너무 둔하고 너무 속편하게 믿어서 미안하다고 웅얼거렸다.
직원 한 분이 화장지를 건네주고 갔다.
05
간신히 숨쉬는 모습을 보면서 미안했다. 이렇게 목숨을 연명하려고 조취하는 게 나의 욕심인 것만 같았다. 초점을 잃은 눈을 보면서, 뇌에도 독이 들어가 경련하는 발을 보면서, 온기를 잃어가는 싸늘한 몸을 쓰다듬으면서, 내가 리카를 괴롭히는 것만 같았다. 리카는 몸에 퍼진 독에서 해방되고 싶은데 나의 욕심이 리카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만 같았다. 리카는 이미 다른 곳을 떠돌고 있는데 내가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더 붙잡고 있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 토요일에 하기로 한 혈액검사를 진행한 후 판단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좀 더 일찍 작별하는 것이 잘 하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반쯤 감긴 눈을 보면서, 억지로 눈꺼풀을 열면서 “제발 살아나”라고 말하다가 멈추곤 했다. 이젠 정말 뭐가 잘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리를 접고 의사에게로 가서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건지 모르겠다고, 지금 이렇게 계속 치료하는 것이 나의 욕심인 것만 같다고. 의사도 쉽게 대답을 못 했다. 생명이라면 단 1초라도 더 살고 싶지 않겠느냐고 의사는 말했다. 의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고, 고마운 대답이었다.
06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입술을 계속 깨물었고 얼굴을 자꾸 찡그렸다. 눈을 자꾸 찡그렸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며 바람을 불렀다. 바람을 부르며 그 자리에 주저 앉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다. 서둘러 옷을 벗고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었다. 알콜솜으로 손을 소독하고 나서야 바람을 쓰다듬었다. 아미캣을 주고, 바람을 꼭 껴안았다. 바람에겐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별 일 없다는 듯 행동하고 싶었다.
바람은 잘 견디겠지? 그런데 바람아, 우리 이제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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