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겸 자학 겸 겸사겸사

종종 사무실이 있는 건물을 돌아다니곤 한다. 복잡한 머리를 정리할 필요가 있거나, 그냥 머리를 식히고 싶거나, 뭔가 새로 시작할 필요가 있거나 할 때면 건물 안을 돌아다닌다. 오늘 아침도 그랬다. 글을 쓰기 전에 고민을 정리하려고 돌아다니다가 나의 선생님(지도교수)과 논문심사를 할 선생님들 중 한 분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걸 봤는데, 우연히 한 마디가 들렸다. “석사논문 쓰는데 박사급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며칠 전 나의 좌절이 떠올랐는데, 확실히 선생님도 눈치 채고 계셨다.

본문 마지막 부분을 남겨놓고 지난 주 금요일이나 토요일이면 끝낼 수 있을 거라고 계획을 세웠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에 가장 부담스러운 부분이었다. 뭔가 몸에서 이야기는 맴도는데 툭, 하고 튀어나오지 않는 상태. 그래서 역시나 건물을 돌아다니다 깨달은 바, 나의 능력은 이제 갓 석사과정을 수료한, 하지만 석사수료생이면 알 거라고 기대하는 정도의 수준엔(그런 수준이 있다면) 한참 못 미치는데, 논문 주제와 구성은 박사논문으로 쓰기에나 좋다는 것을. ㅠ_ㅠ (그럴듯한 학력이나 학벌이 있는 이들보다 제도권 공부를 하건 하지 않건 훨씬 똑똑한 사람들이 넘치지만, 지금의 내가 제도권에서 공부하고 있으니 제도권의 형식과 편견에 기댄 비유임. 내 주변엔 똑똑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제도권에 기댄 상상력은 나를 조롱하기에 그만이다.) 난 도대체 뭔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뭐, 그래도 이 깨달음이 조금 위로는 되었다. 내가 지금 헤매고 있는 건 어쩔 수 없구나, 랄까. -_-;; 무식하니 용감하다고 나의 무식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다. ㅠ_ㅠ

며칠 전에 선생님과 본문의 일부로 얘기를 나누다가, 선생님이 지나가는 투로 “나중에 논문을 발전시켜서 책으로 내면…”이란 말씀을 하셨다. 책으로 낼 정도의 내용이란 의미가 아니라 몇몇 구절들이 논문 형식에 부적합하다는 걸 지적하며 말씀하신 것. 근데, 사실 논문 쓰면 책으로 내자는 말을 꺼냈거나 꺼내다가 중간에 멈춘 사람이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논문 주제 정도만 알고, 다른 한 명은 주제조차 모른다. 하지만 난 장담할 수 있다. 나의 선생님껜 정말 죄송한 말이지만, 나중에 결과물을 보고 나면 내게 이런 말을 했다는 것 자체를 후회할 거란 걸. 후훗. 아, 웃을 일이 아닌가.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친구의 말처럼 그냥 뭔가를 하나 제본한다는 데 의의를 두고 있다. 한 땐 나의 글로 인해 죽어가는 나무들에게 미안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고민했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다 모르겠다. 한글 프로그램의 기본 설정으로 60~70쪽 정도 분량의 긴 글을 써보는 훈련을 했다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 ㅠ_ㅠ 그리고 1월 2일 이후엔 잠적할 지도 모른다. 후후. 사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기억들 중 원하는 부분만 골라서 지울 수 있다면, 내가 뭔가를 쓴 적이 있다는 사실만 골라서 다 없애고 싶다. 흐.

그럼에도 나는 내 논문의 가장 확실한 쓸모와 의의를 알고 있다. 라면냄비 받침은 아니고-_-;; 깔끔하게 정리할 예정인 인용문헌 목록. 예전부터 내 글을 읽고 나면 인용문헌이 많은 도움이 된다는 얘길 여러 군데서 들은 적이 있고, 나 역시 인용문헌이 도움이 되길 바라는 욕심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인용문헌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훗. -_-;; 이건 뭐랄까, 작가지망생이 작품은 안 쓰고 수상소감만 쓰는 격이랄까. 하지만 이렇게라도 정신줄을 놓지 않으면 어떻게 버티겠어. ;;;

참, 글을 쓰면서 아쉬운 건, 사람들이 권해준 정말 도움이 될 참고문헌들 상당수 못 읽었다는 것. 아마 두고두고 아쉬울 거다. 아울러 예전부터 책의 존재는 알고 있지만 나의 게으름으로 인해 못 읽은 몇몇 책들도 아쉽다. 하지만, 뭐 나중에 읽으면 되니까. 제도권이건 제도권이 아닌 다른 곳에서건 공부는 계속 할 거니까.

+
며칠 전 나의 선생님께 드린 본문의 일부를 돌려받았다. 역시나 지적받지 않은 문장을 찾는 게 더 어렵다. 흐. 아주 가끔은 내가 글이란 걸 쓸 줄은 아는 걸까를 고민하며 지금까지 원고를 청탁해준 분들에게 죄송함도 느끼지만, 그래도 선생님의 지적이 적힌 원고를 돌려받으면 힘이 생긴다. 선생님은 뒷목 잡고 쓰려질 지경이지만, 논평을 받는 나는 글을 쓰고 싶은, 글을 써야겠다는 힘이 생긴다. 아무려나 선생님은 예전에 한 학생이 선생님의 논평에 쓰려져서 병원에 입원한 일로 상당한 충격을 받으셨기에 논평한 걸 돌려주시고 나면 거의 항상 다음날 아침에 전화를 주신다. 근데 며칠 전엔 그날 저녁에 문자를 주셨다.

“아직 살아 있어요?”

열심히 해야 할 텐데 걱정이다.

4 thoughts on “근황 겸 자학 겸 겸사겸사

  1. 듣고 쓰러져서 입원할 정도의 논평이랑 대체 어떤 논평인가요! 어쨌든 이 글로 루인이 살아 있다는 건 확인했군요:) 살아 있는 게 결국 장땡 아닌가요-ㅅ-;;(→자기 글이 엉망으로 나와도 그닥 성찰하지 않는 사람의 한마디) 이렇게 자학을 동반한 노력이 있어야만 사람은 발전을 하는 거겠죠? 흑ㅠ_ㅠ

    1. 나중에 만난다면 논평을 받은 원고가 어떤 형상인지 보여드릴게요. 흐흐. ㅠ_ㅠ
      전 자학만 전문으로 하고 노력은 아웃소싱해요. 흐. -_-;; 자학은 정말 잘 하는데, 노력이 잘 안 돼요. ㅠ_ㅠ 그래서 만날 똑같은 이유로 지적받기도 해요. 흐흐.

    1. 제가 약장사에 낚시꾼인 거 아시잖아요.. ㅠ_ㅠ
      나중에 제본이 나온다면 꼭 드려야 하는데, 그래서 더 걱정하고 있어요. 흐흐.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