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안 혹은 차별촉진법안: 이건 “그들만”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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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시옷]이라는 인권만화책엔 홍윤표의 “이상한 나라의 홍대리”란 만화가 있다. 주인공은 어쩌다 100년 뒤의 한국으로 간다. 100년 뒤의 한국은 차별을 당연시하고 차별수호국이 존재한다. 피부색의 차별은 등급별로 나눠서 일정 이상 짙어지면 취업, 사회보장 등에서 차별을 하고, “남녀”차별은 당연한 거고, 출신지역도 서울과 비서울이란 식이 아니라 면 단위, 동 단위로 나눠서 차별한다. 100년 뒤의 세상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지금 현실에서 존재하고 있는 차별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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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7월 즈음 인권위는 법무부에 차별금지법안을 제출했다고 한다. 애초 계획은 지난 3월 법무부에서 입법예고를 한다고 했는데 지난달인 10월 2일 입법을 예고했다. 입법 예고에 들어간 차별금지조항은 20개.
성별, 장애, 연령,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출신지역,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및 출산), 종교, 정치적 의견, 사회적 신분, 출신국가, 병력(아픈 거), 언어,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범죄 및 범죄력, 성적 지향, 학력.

인권위의 이 법안이 법무부에 제출이 되었을 때만 해도, 이 법안이 그대로 통과되면 전 세계에서 유래 없는 법이 될 거라는 말을 하곤 했다. 특히 LGBT와 관련해선, 헌법 차원에서 성적 지향(동성애, 양성애, 이성애)이나 성별(남성, 여성 혹은 그 어느 쪽도 아닌 사람-인권위에선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항목이기도 하다지만, 글쎄, 그다지 수긍이 가는 건 아니다)와 관련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적 장치가 있는 국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근데 어제 “번개“에 갔다가 들은 소식. 법무부에서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진행하고 있는데, 차별금지항목 20개 중에서 7개를 빼고 제출한단다. 그 7개는
병력(아픈 거), 언어,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범죄 및 범죄력, 성적 지향, 학력
학력에 의한 차별을 금지 하지 않겠으며, 가족형태나 가족 상황에 맞춰(일테면 한부모가족) 차별을 해도 괜찮으며, 성적 지향에 따라 차별을 해도 괜찮으며…. 뭐, 따지고 보면 새로울 거 하나도 없다. 이미 차별을 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단지 법안에 따르면 이런 차별을 방관하겠다, 혹은 묵과하겠다, 라고 정부의 공식 입장을 밝히는 정도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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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번개”를 조직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차별금지법안에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을 가지고, 종교계를 비롯한 상당히 많은 보수단체에서 엄청난 반발을 하고 있고, “동성애차별금지법안저지의회선교연합”이라는 단체까지 발족한 상황에 맞춘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번개를 하는 날, 7개 조항이 빠진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번 차별금지법안에 가장 많은 반응을 보인 곳이 “기독교”를 빙자한 단체들인 건 분명하다. (빙자했다고 표현하는 건, 모든 기독교단체가 차별금지법안을 반대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 혹은 종교를 빙자해서 각종 친부시-보수정책을 지지하는 단체들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듯.) 그리고 그들의 주장은, “동성애반대”였다. 흔히 들을 수 있듯, 차별금지조항에 “성적 지향”이 들어가면 “동성애를 조장하는 거다”(근데 왜 조장하면 안 되지? 크크크 ;;)란 식의 주장들을 하면서. 이 단체들에서 팩스를 통해 법무부에 항의를 하거나, 기독교 국회의원들을 통해 대책기구를 세우며 상당한 반발을 했고, 그래서 법무부에서도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논란에서 빠진 건 “성적 지향”만이 아니다. 소위 보수언론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지속적으로 차별금지법안을 우려했고, 기업들에서도 상당한 반대가 있었기에, “성적 지향”을 빼면서 “병력(아픈 거), 언어,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범죄 및 범죄력, 학력”도 같이 뺀 것이다.

혹시나 “성적 지향” 때문에 다른 항목도 빠진 것이다, 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다면 유감이지만 이는 대상을 잘못 향한 것이다. 이번 사건은, 오히려 이런 차별들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별개의 것이 아닌지를 알려준다고 느꼈다. 종교단체에서 “동성애 반대”(“성적 지향”을 이렇게 표현했고, 그들에게 “동성애”는 곧 동성애, 양성애, 트랜스젠더 등을 모두 포괄한다)를 주장하며, “차별하고 혐오 발화를 할 수 있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막지 말라”는 말을 할 때, 이는 다른 상황들도 차별을 하겠다는 걸 의미한다.

…어제 마이크를 잡았을 때, 사실은 이런 맥락의 얘기를 하고 싶었다.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라고 해서 모두가 동일한 이해관계에 있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움직여야 할 때가 있다. 어제처럼. 그러며 이번 지렁이 포럼에서 루인이 하기로 한 발제의 내용을 조금 바꿔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고 있다. 글 자체는 안 고치더라도, 발표를 할 때, “번개”와 관련해서 어떻게든 언급을 할 것 같다.

7 thoughts on “차별금지법안 혹은 차별촉진법안: 이건 “그들만”의 일이 아니다

  1. 핑백: Run To 루인
  2. 허.. 이런 일이 있었군요. 놀랍네요. 다른 것도 다 그렇긴 하지만.. 병력, 가족형태 및 가족 상황, 학력 이걸 계속 차별해도 된다고 하는 말은 참… 진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군요.

    1. 정말 뜨악스럽지 않나요? 근데 이런 상황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기도 하거니와, 언론에서도 거의 보도를 안 한다는 점이에요.

  3. 핑백: Run To 루인
  4. 정말 언론에선 단 한마디도 언급이 없던걸요. 나쁜놈들..

    1.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어떻게 단 한 줄의 기사도 없는지. 그나마 계속해서 기사를 쓰고 있는 곳은 “크리스천투데이”더라고요. 흐흐 -_-;;

  5. 핑백: Run To 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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